2009년 01월 01일 아침 9시 40분.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이다. 전형적인 시골의 조그마한 버스 정류장…
산청가는 버스가 10시 20분이라고 하니 이제 30분 가량 남은것 같다..
10년 만인가? 딱 그런 것 같다. 결혼 후에 처음가는 지리산행이니까… 사회 생활 시작하면서 결혼하기 전까지는 일년에 두 번씩-여름휴가와 연말연시에, 화엄사~노고단을 거쳐 천왕봉~중산리에 이르는 종주[縱走]를 하곤 하였는데…
오늘은 종주가 목적이기 보다는 만행[漫行]이다. 가볍게 걷자고 나온 길인데 배낭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오랜만의 산행이라 감이 없어 그런지 이것 저것 들쳐 넣었더니 족히 20kg은 되는 것 같다.
이번 코스는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능선을 따라 걷다가 체력이 되면 성삼재까지 가서 남원쪽으로 내려오거나 아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뱀사골쪽으로 내려와서 원래의 출발점인 장계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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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출발 예정시간을 10분 넘겨 10시 30분에 장계를 출발하여 육십령 고개를 넘고 서상~안의~수동을 거쳐 산청에 도착했다. 산청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중산리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원지로 가서 거기서 갈아타라고 알려준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원지에 도착해서 물으니 12시 25분 가량 중산리로 가는 버스가 있단다. 간이 버스 정류소에는 가족 등산객 두세 팀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뿔사~!! 버스를 놓쳐 버렸다. 아저씨가 빨리 택시타고 따라 잡으란다. 하는 수 없이 택시 잡고 버스를 따라 갔다. 다행히도 이 버스는 직행이 아니라 중간 중간 정류소 거치고 사람 내려다 주곤 하다 보니 얼마 못 달려 앞서가는 버스를 세우고는 겨우 올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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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1월 01일 오후 12시 30분 드디어 중산리에 도착하다.
98년말 99년초에 처음 직장에 다니던 동료와 함께 했던 지리산 등반의 하산길을 마지막으로 근 10년 만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도 무심하고 어렸다. 이른 꼭두새벽부터 조그마한 후레쉬 불빛에 의지하여 화엄사에서부터 걸어 올라 노고단~천왕봉까지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였으니…
나 자신만의 강행군이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같이 했던 James와 나이 어린 여직원 J 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것 이다. 등반 도중에 너무 힘들어서 여직원 J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건 아마 James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지만 호승심과 몇 번 먼저 경험해 봤다는 우쭐함에 빠져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할 줄 몰랐던 내 자신을 되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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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인지라 그냥 오르기엔 허기가 져서 중산리의 음식점에 들러 산채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생수를 하나 사서 배낭에 구겨 넣고는 출발이다.
저기 십자가 뒤로 보이는 눈덮인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그런데 예서 보니 중산교회의 십자가가 천왕봉 보다 더 높아 보인다.
눈에 쉽게 보이지만 저기에 이르는 길은 이제 부터 고난의 행군이리라. 배낭을 조여 매고는 차곡차곡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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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지리산 등반 코스 초입, 야영장 근처에 빨치산 토벌 기념관인가 하는 게 있다. 역사는 어느 누구만의 것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닌 승자와 패자가 함께 이루어낸 공동의 유산이라고 했던가?
지리산…. 토벌군에게는 승리의 역사요, 남로당 빨치산(Partisan)에게는 패배의 역사이리라. 박종화님의 “지리산”을 읊어 본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 가슴 살아 솟는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사랑이
골 깊은 허리에도 울부짖는 가슴에도
덧 없이 흐르는 산하
저 산맥도 벌판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산만 보면 소리 들린다
헐벗은 저 산만 보면
지금도 울리는 빨치산 소리
내 가슴 살아 들린다 .....
동학 농민군, 지리산 빨치산, 광주 시민군.. 당대의 역사에서 누구에게는 제압과 토벌의 대상이었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혁명의 꿈 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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