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01일 오후 4시 10분… 드디어 법계사가 보인다
왼쪽 움푹한 곳이 법계사이고 거기 조금 밑에 로타리 산장이 붙어 있다. 오른쪽 위로는 눈 덮인 천왕봉이 보인다. 바람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있다. 숨돌리기 위해 등산복 외투를 벗고 바람을 쐬는데 등 밑으로 흐르던 땀으로 흥건히 젖었던 셔츠가 찬 바람에 단박에 얼어 붙어 뻣뻣 해진다. 얼른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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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예약하셨어요?”대피소 직원이 묻는다.
“…(머뭇머뭇)…예약이 꽉 차서 그냥 왔는데요”
“그럼 왠만하면 입산하지 말지 그랬어요… 그런 신발로 오셨어요?” (황당하고 한심하다는 듯한 분위기…)
여름 양말에 운동화 행색의 나… (갑자기 내 자신이 멋적어 진다)
아마 대피소 직원은 등산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고 더군다나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놀라서 그런것 같다. 아이젠을 준비 했지만 중산리에서 로타리 산장까지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아이젠을 배낭속에 고이 넣어 왔다.
“저… 대기자로 해주세요”
일단 추우니까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고 있으라고 한다. 6시까지 예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자리 배정하고 다음에 대기자들 차례란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출발했던 지라 미리 산장 예약을 하지 못했고 또 무엇보다도 이미 인터넷 예약이 꽉차서 예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예약제 이전에는 선착순이었는데 그 때도 사람들이 많으면 복도나 마루에 쪼그리고 잠을 자는 경우가 있었기에 편히 누울 수 있는 잠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대피소 안에 쪼그리고 추위를 피할 수 있다라면 문제 없겠다 싶어 그냥 달린 것이다.
아무튼 다행이다…. 우선은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추위를 녹였다. 몸이 좀 녹자 잠시 시간을 내어 법계사를 둘러볼 겸, 그리고 아직 6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고 또 대피소 안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나섰다.
산장에서 법계사 가는 입구에 표지판이 하나 서있다. 법계사 일대는 지리산 빨치산 부대의 사령부 역할을 하던 장소란다.
지리산 법계사… 도량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3층 석탑 근처에서 차가운 냉수로 목을 축인다. 맹렬히 추운날임에도 불구하고 차디찬 약수가 상쾌하다.
멀리 한 바퀴 경관을 휘 둘러 보고는 추위에 쫓겨 얼른 대피소로 다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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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원을 내고 잠자리 하나를 얻었다. 천만 다행이다. 매서운 칼 바람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하게 다리뻗고 누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으니… 이제는 먹는 일만 남았다. 일회용 밥(햇반)과 라면 하나 그리고 코펠/버너를 챙겨 취사장으로 간다. 코펠 하나에는 라면물을 끓인다. 또 다른 한 쪽에는 물을 두 컵 정도 붓고 고구마나 떡을 찔 때 사용하는 삼발이 찜틀을 올려 놓는다. 거기에 일회용 밥 알맹이를 넣고는 증기로 밥을 데운다.
다들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먹는다. 앞에 계신 부부가 양념돼지불고기에 소주를 권한다. 당연히 사양하지 않고 넙죽 받아 먹는다. 피곤함의 끝이라서 그런지 꿀 맛이다. 음… 소주를 사올 걸... 하는 후회가 스친다.
밥을 먹고 있는데 진동이 느껴 진다. 집이다. 부재중 전화도 찍혀 있다.늙은 부모님이 장년의 아들이 산속에서 얼어 죽지 않나 걱정이 되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해서 놀란 눈치다. 따뜻한 잠자리 얻었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전화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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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속에는 물이 귀해서 중산리에서 사온 물 900ml 짜리 한 통이 저녁 식사하는데 모두 사용되었다. 물 부족을 포함하여 산에서의 자연보호를 위해 집에서 처럼 설겆이를 하는 것은 언감생시 불가능 한 일이다. 먼저 휴지로 라면 끓인 코펠을 닦고는 밥을 데우기 위해 썼던 물을 재활용 한다. 먼저 한 컵이 못되는 물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따로 따라 놓고는 한 컵 정도의 물로 라면 코펠을 헹구는 것으로 설겆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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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소등이기 때문에 군용모포와 침낭으로 2층 19번 자리에 잠자리 깔고 잠시 불끄기 전까지 대피소에 비치 되어 있는 시집을 펼쳐 본다. 시집 중에 나희덕 선생님의 詩가 와 닿는다.
“사라진 손바닥”
”상현(上弦)”
“오분간”
“와온(臥溫)에서”
특히나 “사라진 손바닥”이라는 시 중,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서서히 가라앉고 있네”
라는 구절.. 연꽃이 지고 연대가 꼬꾸라져가는 모습의 표현이 마음을 휘어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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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분간 ] –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 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라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 올라 꽃 그늘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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