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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6, 2010

이상(李箱)의 놀이

이상(李箱)의 노는 모습을 한 번 따라가 보자.
첫 번째 ; 뭐니 뭐니 해도 그 첫 구경 거리는 불구경이다. 

격장(隔墻)에서 불이 났다. 흐린 하늘에 눈발이 성기게 날리면서 화염(火焰)은 오적어(烏賊魚 ) 모양으로 덩어리 먹을 퍽퍽 토한다. 많은 약품을 취급하는 큰 공장이란다. 거대한 불더미 속에서는 간헌적(間歇的)으로 재치기하듯이 색다른 연기 뭉텅이가 내뿜긴다. 약품이 폭발하나보다. 역(亦) 송구스러운 말이나 불구경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뒤꼍으로 돌아가서 팔장을 끼고 서서 턱살 밑으로 달겨드는 화광(火光)을 쳐다보고 섰자니까 얼굴이 후끈후끈해 들어오는 것이 꽤 할 만하다. 잠시 황홀한 엑스터시 속에 놀아본다.
불을 붙여놓고 보니까 뜻밖에 너무도 엉성한 그 공장 바라크는 삽시간에 불길에 휘감겨버리고 그리고 그 휘말린 혓바닥이 인접한 게딱지 같은 빈민굴을 향하여 널름거리기 시작해서야 겨우 소방대가 달려왔다. 인제 정말 재미있다. 3방으로 호스를 들이대고는 빈민굴 지붕 위에 올라서서 야단들이다. 하릴없이 까치다.

이만큼 떨어져서 얼굴이 뜨거워 못 견디겠으니 거진 화염 속에 들어서다시피 바싹 다가선 소방대들은 어지간하렷다 하면서 여전히 점점 더 사나워오는 훈훈한 불길을 쪼이고 있자니까 인제는 게서 더 못 견디겠는지 호스 꼭지를 쥔 채 지붕에서 뛰어내려온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그 실오라기만도 못한 물줄기를 업신여기자니까 이번에는 호스를 화염 쪽에서 돌려서 잇닿은 빈만굴을 막 축이기 시작한다. 이미 화염에 굴뚝과 발래 널어놓은 장대를 끄실리우기 시작한 집에서들은 세간 기명(器皿)을 끌어내느라고 허겁지겁들 법석이다. 

하도들 들이몰리고 내몰리고들 좁은 골목 안에서 복작질들을 치길래 좀 내다보니까 삼층장 의걸이 양푼 납세독촉장 바이올린 여우목도리 다 해진 돗자리 단장 스파이크 구두 구공탄 풍로 뭐 이 따위 나부랭이가 장이 서다시피 내 쌓였다. 그 중에서도 이부자리는 물벼락을 맞아서 결딴이 난 것이 보기 사납다. 그제서야 예까지 타들어 오려나보다 하고 선뜩 겁이 난다.

집으로 얼른 들어가보니까 어머니가 덜~덜 떨면서 때묻은 이불 보퉁이를 뭉쳤다 끌렀다 하면서 갈팡질팡하신다. 코웃음이 문득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 그건 그렇게 싸서 어따가 내놀 작정이십니까 – 하고 묻는다. 불길은 인제 서향 유리창에 환~하다. 타려나보다. 타면 탔지-하는 일종 비유키 어려운 허무한 생각에서 다시 뒤꼍으로 돌아가서 불구경을 계속한다.

불행히 불은 예까지는 오기 전에 꺼졌다. 그 좋은 불구경이 너무 하잘것없이 끝난 것도 섭섭했지만 그와는 달리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적막을 느낀다.

- 『보험(保險) 없는 화재(火災} 』, 【 조춘점묘(초)早春點描(抄) 】 中 1936, 《매일신보》 -

두 번째 ; 시체놀이

얼굴이 이렇게까지 창백한 것이 웬일일까 하고 내가 번민해서- 내 황막(荒漠)한 의학지식이 그예 진단하였다. - 회충(蛔蟲), 그렇지만 이 진단에는 심원(深遠)한 유서(由緖)가 있다. 회충이 아니면 십이지장충 - 십이지장충이 아니면 조충(條蟲) - 이러리라는 것이다. 회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조충약을 쓰고, 조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그 다음은 아직 연구해보지 않았다.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하여 우선 회충산(蛔蟲散)을 돈복(頓服)하였다. 안다. 두 끼를 절식절식 해야 한다는 것도, 복약 후에 반드시 혼도(昏倒)한다는 것도. 대낮이다. 이부자리를 펴고 그 속으로 움푹 들어가서 너부죽이 누워서, 이래도? 하고 그 혼도라는 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마음이 늘 초조한 법, 귀로 위胃 속이 버글버글하는 소리를 알아 보고, 옆구리만 좀 근질근질해도 아하 요게 혼도라는 놈 인가보다 하고 긴장한다.

세시를 쳐도 역시 그 턱이다. 나는 그만 흥분했다. 혼도 커녕은 정신이 말똥말똥하단 말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금방 십이지장충약을 써보기도 싫다. 내 진단이 너무나 허황한데 스스로 놀라고 또 그 약을 구해야 할 노력이 아깝고 귀찮다.

구름 피듯 뭉게뭉게 불쾌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러다가는 저녁 지으시는 작은어머니와 또 싸우겠군 - 얼마 후에 나는 히죽히죽 모자도 안 쓰고 거리로 나섰다.

- 『恐怖의 記錄(抄)』 中 -


세 번째 ; 이제는 놀기도 쉽지 않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 그럼 - 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와 열 두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倦怠)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 -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줄 만큼 져주면 이 상승장군(常勝將軍)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 밖에 없다.

- 『권태(倦怠)』, 이상, 1936 -

젠장 세상에 쉬운 것 하나도 없다더니 노는 것도 쉽지 않다.

| 2009-03-06 00: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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