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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01, 2010

[지리산] 2009년 정초 지리산 산행 | 其 二

2009년 01월 01일 오후 2시 25분 칼바위 도착


칼바위를 거쳐 가니 이정표가 나온다. 로타리 대피소 2.1km 천왕봉 4.1km


천왕봉까지의 4km가 죽음의 사(死) 킬로미터 이리라…

겨울 산속에서는 해가 빨리 떨어지고 살인적인 맹 추위가 기습을 하는지라 6시 이전에는 대피소에서 도착해서 몸을 뉘어야 한다.

지금 여기 이정표에서의 시간이 2시 30분이니 로타리 산장까지 2.1km, 천천히 오르면 4시가 넘을 것 같다. 오늘은 로타리 산장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리라 생각하고 길을 재촉한다.

중산리~천왕봉 코스는 역시나 힘들다… 나이 탓인가? 아님 그 동안의 운동 부족인가 숨이 차올라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가파른 계단은 사람을 좌절케 한다. 온 몸에 땀이 차 오른다. 쉬엄쉬엄 오르는 길임에도 기진맥진이다.



엇갈려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몇 일의 산행에 씻지도 못하고 초췌한 몰골로 피로에 지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일 코스로 천왕봉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중에 누가 그런다. “지리산이 Well-being 등반 코스가 될 줄이야…”



산행을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원로 산악인의 [1957년 지리산 산행기]의 내용이 문득 떠 올랐다. 약 10여 일에 걸쳐 무더운 여름 땡볕과 장마 속 행군에 생쥐와의 전쟁과 도강작전을 거치면서 진주에서 부터 걸어서 중산리~천왕봉까지의 산행기 였는데… 그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은 웰빙 여행이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   ●   ●

[산행준비 ]


2년전인 55년에 지리산 초등을 하고  이제 두번째 지리산을 가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쌀 여섯되, 미싯가루 두되, 군용텐트, 시트겸 판쵸, 군용침낭, 김치독, 간장, 된장 고추장 버무린 독, 마니라로프 20m, 카메라, 쌍안경, 삽, 톱, 야전도끼, 야전곡괭이, 간식, 부식, 세면구, 보온주, 석유 알콜 한되씩, 알콜깡통, 항고 등등.....


산더미 같은 장비를 쌓아놓고 보니 륙색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자갈치 시장에서 급히 군용 샌드백을 구입했다. 샌드백 한쪽 포켓에 항고가 두개쯤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양쪽을 붙이고 그보다  작은 포켓을 가운데 붙였다.  넣을것이 많아서 위에도 세개의 포켓을 달고나니 아주 근사하다. 이 륙색을 만든 다음 너무도 좋아서 자다가도 깨어서 만져보고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1957년 6월 23일]


06시 철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열차가 삼랑진을 지날무렵에 오직 나만 믿고  동행한 Y군과 L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과연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마산을 지나 터널을 지날때마다 석탄가루가 얼굴에 달라붙고 더워서 질식할 뻔 했다.


12시 40분,부산을 출발해서 6시간 40분만에 진주에 도착했다.진주역에는 같이 산행할 Y군의 친구 K가 마중나와 있었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이 친구를 보니 천군마마를 얻은 기분이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역에서 2키로거리인 시외버스 정류소에 오니 하루에 한번  다니는 덕산가는 버스가 이미 떠나고 없다. 어차피 진주에서 중산라까지 걷기로 작정하고 나왔으니 하는 수 없다


물어 물어 산청 방향으로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하면서 행군을 계속 했다. 진주에서 "원지"까지가 50리라 하지만 65kg 정도의 짐이 너무 부담스러워 "명석"에  도착하니 촌보도 움직일 수가 없어 어느 과수원 귀퉁이에 텐트를 치고 첫밤을 보냈다.


[6월 24일]


"명석"지서 순경이 운이 좋으면 고령토 트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줄터이니 기다려 보란다. 9시경 요행히 먼지 펄펄나는 트럭을 얻어 탓는데 한참을 가니(12키로 정도)내리라 한다.


"시천(덕산)"을 향해 또다시 걷는다.입은옷이 소금에 절어 뻣뻣해질 때까지 걸었다. 긴 여름해가 어둠에 깔릴때까지 걸어온 덕분에 8시경에 덕산장터에 닿아서 강둑에  텐트를 치고 고단한 몸을 뉘였다.


[6월 25일]


덕산에서 "곡점"까지 12키로라고 한다. 시어서 못먹게 된 김치독 1개를 미련 없이 버리고 나니 한결 짐이 가볍다.


덕산을 출벌한지 4시간만에 곡점에 도착해서 중산리까지 갈려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더 이상 걷기가 힘이들어 오늘은 일찌감치 곡점에서 텐트를 친다. 곡점 마걸리도가의 냄새에 이끌려 네명이 두말을 먹고 잠이 들었다.


[6월 26일]


오늘부터는 좀 힘차게 걸으려고 마음을 먹고 중산리를 향하는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빗물이 륙색안으로 들어가서 꿀렁거려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동당리"마을 재실에 대피해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 이 곳에서 하루밤 잘 수 밖에 없다.


시간이 많아서 간식으로 콩을 볶아 먹기도 했다. 콩을 먹으며 계속 물을 마셔대던 L군이 저녁에 결국 설사를 만나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6월 27일]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빗속을 걸어 "하중산리"에 닿으니 계곡의 물살이 엄청 나서 칡넝쿨로 얽어 만든 통나무 다리를 건널때는 눈이 뱅뱅 돌지경이다. 


"하중산리"의 돌아가지 않는 물레방아간에서 잠시 비를 피한 후 다시 빗속의 황토길을 걸어서 "중중산리"에 오르니  점심때가 훨씬 지난 2시 10분 이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밥을 지을수 없어 미싯가루로 허기만 면하고 급한 경사 길을 올라서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 초입인 "상중산리에 도착했다. 


땅이 질퍽거려 텐트칠 자리가 없어 "홍순표"씨라는 집에 민박을 했는데 얼마나 방에 불을 많이 땟는지 이틀 동안 비에 젖은 옷이며 장비가 밤새 바짝 말랐다.


[6월 28일] 


오늘도 비는 안그친다. 중산리 언덕에서 보니 계곡에 집채만한 돌들이 굴러 내려오고 있다. 마을에서 논이 있는 곳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근 두시간을 헤메었는데도 논 길을 찾을 수가없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진주의 k군에께 의논을 하니 사실은 자기도 지리산이 오늘 처음 이란다. 그러면 왜 잘 안다고 했냐고 힐책을 하니 안그러면 동행시켜주지 않을것 같아서 거짓 말을 했단다. 


기가 막힌다.  할 수 없어 홍순표씨집에 다시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길을 안내받긴 했는데 불어난  물 때문에 도저히 계곡을 건널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계곡의 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빗줄기는 차츰 약해지며 오후가 되니 그치긴해도 계곡물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순두류 삼거리 지점의 언덕을 깎아 젖어서 납덩이 같은 텐트를 치고 시끄러운 물소리와 함께 또 하룻밤을 중산리에서 보낸다.(지금의 매표소 맞은편 언덕) 


[6월 29일-도강작전] 


물소리 때문인지 도강 걱정 때문인지 잠이 안온다.지리산의 아침은 우중에도 밝아왔다. 도강 준비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마닐라 로프를 활용하기 위해 5미터 전방에 있는 바위까지 나무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허벅지만한 나무 세개를 야전도끼로 찍어서 엮어 일단 간이 다리를 만들었다. 거기서부터는 짐 없이 힘껏 다음 바위로 도약하고 또 도약하고 그래서 첫번째  대원이 넘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로프를 강 저쪽으로 던져 나무에서 나무로 연결한 뒤 륙색은 먼저 보내고 대원들은 뛰어 건너 겨우 도강에 성공했다. 3시간 20분이 걸리는 대 역사였다.


여기서 우측 소로를 따르면 순두류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야 칼바위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왼쪽길로 접어드니 민가 두채가  나타난다. 물소리가 얼마나 장황했던지 그토록 고함을 지르고 했는데도 전혀 듣지 못했다 한다. 


칼바위에 도착하니 3시30분경. 시계에 물이 들어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첫째 개울  둘째 개울을 건너고 우측으로 가라는 신신당부를 받았지만 우측에는 길이  없고  왼쪽에 길이 있어 륙색을 벗어 놓고 정찰에 나섰으나 100미터도 못가서 길이  없어진다.


되돌아와 우측으로 길을 찾았으나 도저히 나갈 길이 없다. 일제 군용도로 잡목을  베면서 70미터 정도 전진을하니 희미한 나무꾼 길이 나온다. 알고보니 두번째 개울 건너 다시 그 개울 상류를 건너 우측으로 한바퀴 도니까 길이  연결이 된다. 길을 찾고나니 안심도 되고 피로가 겹쳐 칼바위 캠프에서 텐트를 친다.


[6월 30일]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강렬한 태양이 아침부터 극성을 부린다. 엿새 동안의 노독과 도강 작전에 너무 지쳐서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쉬기로 대원들이 의견 일치를 한다. 


산행로를 확인 하기도 하고 물이 줄어든 개울을 건너 다래밭에서 새파란 다래를 서너 되나 따 오기도 했다. 더위를 식히려 차가운 물속에 들기도 하며 한가한  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위해 항고밥을 일찍 해먹었다. 어제 실수로 알콜 한되를 쏟아 버렸기에 내일 아침 연료용으로 화력좋아 보이는 솔방울을 따서 쌀자루에 담아두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녁에 L군이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니 쥐가 발바닥을 갉아 먹었다고 한다. 무슨 그런 일이 하면서 내 발바닥을 쓰다듬어니 우둘투둘하다. 기역자 전등으로 비춰보니 쥐의 특유한 두 이빨자국이 선명하다. 다시 잠을 청하는데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전등을 비추니 엄지 손가락 만한 새앙쥐가 잠든 Y군의 배를 타고 넘어 달아나는 놈을 워커로 일격을 가해 잡는데 성공한다. 


[7월 1일] 


하루를 쉬었음에도 새앙쥐 사건으로 잠을 설쳐 컨디션이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육중한 륙색을 메었다. 사람길인지 짐승길인지 분간이 어렵지만 간혹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로 길을 확인하곤 한다. 가파른 길을 헤매면서 올라가니 바위가 앞을 막는다. 바위를 탈수 없어 빽하여 길을  찾으니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 같은 것이 보인다. 계속 타고 오르니 이 길이야 말로 망바위로 오르는 코스였다. 


망바위에 올라 성냥갑 같은 중산리를 내려다 보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앞에 보이는 바위가 문창대라고 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문창대를 지나 법계사까지는 가야한다. 


확확 쏟는 지열을 감당하면서 문창대에 닿으니 평길이 나와 살만하다. 평길이 끝나고 자갈돌길이 나올때는 죽었구나 했는데 바위 사이에서 쏱아지는 석간수로 위기를 모면한다.(지금의 로타리 산장 부근) 


은은히 들리는 종소리에 법계사가 가까웠음을 느끼고 급하게 법계사로 향했다. 혹시 법계사가 아닌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무거운 짐과 더위에 지쳐 기다시피 하여 오르니 정자같은 가옥이 나타난다.  큰 돌위에 석탑이 보여서 '옳거니! 절집이 맞다고 확신하고 급경사를 급히 오르니 웬 부인이  반겨 맞는다. 부산에서 왔다고 인사를 청하니 자기는 법계사를 지키는 손보살이라고 한다. 


절 위로  보이는 산봉을 바로 오르고 싶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4키로라고 하면서, 저  봉우리는 일출이 장관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에 오르라고 붙잡는다. 해는 한발이나 남았지만 혹서에 지친 몸이라 거부할 생각도 없이 머물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 나니 산삼이라면서 재배한 인삼을 한뿌리씩 준다. 


여덟가지의 약초로 직접  빚은 팔선주라는 술도 반주전자나 주어서 멋모르고 마시고 저녁도 굶은 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7월 2일] 


고맙게도 손보살이 깨워 주어서 눈을 뜨니 새벽 세시였다. 일출 보기가 힘드니  어떻게  하든지 일출을 보고 오라고 당부를 하는 손보살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햇다.  


기역자 군용 후랫쉬를 비추며 한참을 오르니 날이 밝아오면서 앞에 보이는 산봉이  잡힐듯 하면서 접근하기가 점점 너무나 힘이 든다. 바위가 쫙 갈라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곳에 닿았다. 


이 정도 오르면 개선장군들 이라 고 생각하고 이 곳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했다. 집채만한 큰 바위가 길을 막아 네사람이 륙색을 벗어놓고 길을 찾아 나섰다. 겨우  바위 뒤쪽으로 나 있는 짐승길을 찾아서 오르는데 정말 힘이든다. 산딸기가  수 없이 널부러져 있어도 따 먹을 겨를도 없이 진행한다. 


풀을 베고 나무를 찍어 내면서 나아가니 20미터 정도의 암벽이 또 길을 막는다. 마닐라  로프와 기술을 총동원 했지만 도저히 오를 수 없어 나무를 베어가면서 왼쪽 능선 으로 붙었다. 


이제 길이 좀 나타날까 했는데 다시 움푹 패인 암장 하나가 길을 막는다. 산봉은 잡힐듯 가까워 있고 급한 마음에 바위를 오르려고 몇번 시도를 하나 이끼  때문에 불가능 하여 1시간을 허비 한 다음 하는 수 없이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흘러 내린 바위를 타고 산봉으로 직등을 시도한다. 


넝쿨들이 발을 매섭게 감아 쥐지만 단도로 잘라가며 길을 만들어서 올라갔다. 


법계사에서 지고온 물독이 무색할 정도로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는 곳도 있다. 좌로 우로 비껴 가면서 낙석지대를 오르니 마음은 산봉에 있고 몸은 한없이 지친다. 이제부터 길은 거의 기어서 오른다. 기어서 기어서 오봉밑에 오르니 감로수가 철철 넘친다. 마지막으로 목을 추기고 20미터 정도 남은 산봉을 향해 오르는 도중에 "김순용"영감이 산봉밑에 다지다가 둔 캠프장의 언저리에 삽과 곡괭이가 널려져 있다. 


이제 앞으로 10미터!... 


감격스런 산봉이 눈 앞에 있다. 륙색을 풀어 던지고 가벼운 몸으로 뛰다시피 산봉에  올랐다. 여기가 천왕봉! 이 감격, 이 환희,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번째의 감격이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야호도 외쳤다. 안개가 심해서 일출을 못 보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 더 갈데도 없다.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가. 


그 아쉬움 때문에 도무지 하산할  수가 없어 우리는 천왕봉에 또 캠프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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