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Friday, April 30,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4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63 항 ]
삼위일체설은 최고의 신비이고 절대적인 철학과 종교의 중심점이다. 그러나 그 비밀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증명된 것 처럼 공동사회생활의 비밀 즉 자아에 대한 타아의 필연성이라는 비밀이다. 그것은 인간이건 신이건 정신이건 자아건 어떤 존재도 그 자체만으로는 참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유사한 존재의 통일이나 결합만이 진리이고 완전성이라는 진리다.
철학의 최고 궁극적인 원리는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통일이다. 모든 중요한 제 관계 - 여러가지 자연과학의 원리들 - 는 이러한 통일의 다양한 종류나 방식일 뿐이다.
[ 제 64 항 ]
옛 철학은 이중의 진리를 갖고 있었으니 그 하나는 스스로를 위한 진리 즉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는 진리였고(철학)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진리였다(종교).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해 인간의 철학으로서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철학이고 이론이라는 존엄성과 독자성을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가장 지고한 의미에서의 실천적인 경향을 갖는다 ; 새로운 철학은 종교 대신 들어서서 종교의 본질을 내포하며 새로운 철학은 참으로 종교 그 자체 이다.
[ 제 65 항 ]
철학에서 지금까지 내려온 개혁의 시도들은 그 종류에서가 아니라 방법상으로만 다소간 옛날 철학과 구분된다. 참으로 새로운 즉 독자적이며 인류와 그 미래의 요구에 부응하는 철학의 불가결한 조건은 그러나 본질상으로 완전히 옛날의 철학과 구분되어야 한다.
. End of Book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41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9 항 ]
개별적인 인간 그 자체는 자체의 도덕적인 본질 속에서도 사유하는 본질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 인간의 본질은 다만 사회 속에 즉 인간과 인간의 통일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통일은 그러나 나와 너의 구분이라는 실재성만을 기초로 하고 있다.
[ 제 60 항 ]
고독은 유한이고 제한이며 사회는 자유와 무한이다.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 보통 의미로 인간이지만 인간과 함께 있을 때 즉 나와 네가 통일될 때 신이다.
[ 제 61 항 ]
절대적인 철학은 절대군주의 '짐은 국가다' 혹은 절대적인 신의 '내가 바로 존재다' 라는 말과 비슷하게 스스로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유자로 말하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인간적인 철학자는 말한다 ; 나는 사유속에서나 철학자로나 인간과 함께 있는 인간이다.
[ 제 62 항 ]
참된 변증법은 고독한 사색자가 스스로와 갖는 독백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대화다.
젊은날의 파편 - 우상의 황혼
강원도 겨울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이다.
오지리에 실려오는 일간신문에서 레닌의 동상 위로 올라선 '새로운' 깃발을 보았다.
그 신문에서 사진을 오려내어 레닌의 사진위로 행정반의 타자기로 한자 한자 찍어간다.
의지처 없이, 황량한 바람만 안고 서 있다.
문제제기의 근거도 없다….
배움의 길, 그 길에 들어섬도 없이 좌절되어 버린 상태
혁명을 팝니다.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10-04-30 22:38:58
오지리에 실려오는 일간신문에서 레닌의 동상 위로 올라선 '새로운' 깃발을 보았다.
그 신문에서 사진을 오려내어 레닌의 사진위로 행정반의 타자기로 한자 한자 찍어간다.
의지처 없이, 황량한 바람만 안고 서 있다.
문제제기의 근거도 없다….
배움의 길, 그 길에 들어섬도 없이 좌절되어 버린 상태
혁명을 팝니다.
- 파격의 미?
- 상품화되는 소비에트(Soviet)
그 실체란 무엇인가?
옹호할 이론도 체계도 없다.
무수한 깃발의 흔들림 속에서 꺾여져 내려 갔다.
그런데, 남은 건 무엇인가?
하나의 신념?
근거 없고 허망하다.
차마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는 빈약함.
그게 지난 시간의 경과인가?
흔히"의지의 과잉과 실천의 빈곤" 이라 칭하던 "상황"을 무어라 할 것인가?
이론도 체계도 없다.
무너져 내려 버려진 동상 위에 기대어
남한의 자본가는 변화를 말한다.
변화는 진보이다. 우상파괴....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10-04-30 22:38:58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40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4 항 ]
새로운 철학은 자연을 포함한 인간을 인간의 기초로, 철학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최고의 대상으로 삼고 생리학을 포함한 인간 과학을 보편과학으로 만든다.
[ 제 55 항 ]
예술, 종교, 철학 혹은 과학은 참된 인간 본질의 현상이나 계시에 불과하다. 인간 즉 완전하고 참된 인간은 다만 미적 혹은 예술적, 종교적 혹은 도덕적, 철학적 혹은 과학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자기로부터 배제하지 않는 자만이 무릇 인간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자기로부터 배제하지 않는 자만이 무릇 인간이다" 이 말이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해될 때 새로운 철학의 표어가 된다.
[ 제 56 항 ]
절대적인 동일철학은 진리의 입장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인간의 자연적인 입장, 너와 나로 구별되는 입장,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되는 입장이 참된 절대적인 입장이고 따라서 철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제 57 항 ]
진리에 합당한 두뇌와 마음의 통일은 이 둘 사이의 구분을 해소하거나 가리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마음의 근본적인 대상이 역시 두뇌의 근본적인 대상이라는 사릴 속에 즉 그 대상의 일치 속에만 가능하다. 마음의 근본적이고 가장 높은 대상인 인간을 오성의 근본적이고 가장 높은 대상으로 만드는 새로운 철학은 그러므로 두뇌와 마음, 사고와 삶의 이성적인 통일이다.
[ 제 58 항 ]
진리는 사유 속에 있지 않으며 지식 그 자체 속에도 있지 않다.
진리는 인간의 삶과 본질의 총체성일 뿐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9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3 항 ]
인간은 결코 사유를 통해서만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전(全) 본질이 동물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사유가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인간적인 본질의 필연적인 결과이고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동물을 넘어서는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ㄱ마성의 영역을 넘어설 필요는 없다. 인간은 동물처럼 분파적인 존재가 아니고 보편적인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한도거나 부자유한 존재가 아니고 제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다. 왜냐하면 보편성과 무제한성과 자유는 불가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는 어떤 특수한 능력 즉 의지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성이 사고력의 특수한 능력 즉 이성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 자유와 보편성은 인간의 전체적인 본질 위에 확산되어 있다. 동물의 감각은 인간의 감각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의 욕구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일정한 사물과의 관계에서 일뿐이다. 바로 그러한 결정성 즉 일정한 것에 예외없이 제한된다는 성격 때문에 그것은 더 예민하다고 할수 있다. 인간은 사냥개가 까마귀의 후각을 갖지 못했다 ; 그러나 그대신 그의 후각은 모든 종류의 냄새를 포괄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특수한 냄새에 대해서 분별하지 못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하나의 감각이 분파성의 한계나 욕구와 결부되는 것을 넘어서는 곳에 그것은 독자적이고 이론적으로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승화된다 ; 보편적인 감각은 오성이고 보편적인 감성은 정신력이다. 가장 낮은 단계의 감각인 후각과 미각까지도 인간에서는 정신적이고 과학적인 활동으로 고조된다. 사물의 냄새나 맛은 자연과학의 대상이다. 인간의 위까지도 비록 우리가 그것을 멸시하는 눈으로 내래다볼지언정 그것은 결코 동물적인 본질이 아니라 인간적인 본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정한 종류의 영양분에 제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 먹이를 보고 느끼는 식욕의 난폭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두뇌를 그대로 두고 그 대신 사자나 말의 위를 대치시킨다면 그는 분명히 인간이기를 그만 둘 것이다. 제한된 위는 단순히 제한된 즉 동물적인 감각만을 갖고 소화한다. 그러므로 위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관계는 위를 육식동물의 본질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본질로서 취급하는데 있을 뿐이다. 위로부터 인간성을 배제하고 위를 동물의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을 먹는 것 때문에 야수로 낙인 찍는 셈이 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8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2 항 ]
새로운 철학은 신학을 인간학으로 완전히, 절대적으로, 모순없이 용해한 것이다 ; 왜냐하면 새로운 철학은 신학을 옛날 철학 처럼 이성으로 용해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즉 인간의 전체적이고 현실적인 본질로 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도 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옛 철학의 필연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전에 오성속에서 용해된 것이 마침내 인간의 삶, 마음, 피 속에서 용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용해된 것이 비로소 진리가 되고 이 진리는 물론 새롭고 독자적인 진리다 ; 왜냐하면 살과 피가 되어버린 진리만이 비로소 진리이기 때문이다. 옛 철학은 필연적으로 다시 신학으로 복귀한다 ; 다만 이성이나 추상 속에서 지양된 것은 마음 속에서의 지양과는 반대된다.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해 퇴영적이 될 수 없다 ;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죽어버린 것은 결코 다시 한번 유령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 제 52 항 ]
새로운 철학은 신학을 인간학으로 완전히, 절대적으로, 모순없이 용해한 것이다 ; 왜냐하면 새로운 철학은 신학을 옛날 철학 처럼 이성으로 용해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즉 인간의 전체적이고 현실적인 본질로 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도 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옛 철학의 필연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전에 오성속에서 용해된 것이 마침내 인간의 삶, 마음, 피 속에서 용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용해된 것이 비로소 진리가 되고 이 진리는 물론 새롭고 독자적인 진리다 ; 왜냐하면 살과 피가 되어버린 진리만이 비로소 진리이기 때문이다. 옛 철학은 필연적으로 다시 신학으로 복귀한다 ; 다만 이성이나 추상 속에서 지양된 것은 마음 속에서의 지양과는 반대된다.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해 퇴영적이 될 수 없다 ;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죽어버린 것은 결코 다시 한번 유령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7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1 항 ]
사유와 존재의 통일은 이 통일의 근거와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파악될 때만 의미를 갖고 진리가 된다. 실재적인 존재만이 실재적인 사물을 인식한다. 사유가 주체 자체가 아니고 현실적인 존재의 술어일 때만 사유와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사유와 존재의 통일은 그러므로 사유 자체에 존재가 그 규정으로 부탁되는 어떤 형힉적인 것이 아니다. 사유와 존재의 통일은 그러므로 사유 자체에 존재가 그 규정으로 부착되는 어떤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사유와 존재의 통일은 사유의 대상과 내용에 달려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정언적 무상명령이 나온다 ; 인간과 구분되는 철학자가 되지 않으려면 사유하는 인간 이상의 것이 되지 마라, 사유자로 사유하지 마라, 즉 현실적인 인간 본질의 총체성으로부터 벗어나 고립된 영역에서 사유하지 말라, 생동하고 생기를 주는 대양의 파도에 직면해 있는 살아 있는 현실적인 존재로 사유하라, 실존에서 세계에서 그 구성원으로 사유하고 추상적인 공간에서 흩어진 단자로서, 절대적인 군주로서, 아무 관심없는 세계를 떠난 신으로서 사유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사유가 존재와 사유의 통일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사유가 현실적인 존재의 활동이라면 왜 실제 사물과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단 말인가? 사유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자체로 고정될 때만 고통스럽고 아무런 결과도 없고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 사유가 어떻게 존재로, 대상으로 나아가는가?
왜나하면 그 자체로 고정된 즉 인간의 밖에 설정된 사유는 세계와의 모든 유대나 결속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를 대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대를 다른 것에 대한 대상 자체로 만들기 위해 하락시키는 것을 통해서 일뿐이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다만 그대의 생각 자체가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생각들은 객관성이라는 시험을 이겼을 때, 그대 외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상으로 인정할 때만 참된 것이다 ; 그대는 스스로 보여지는 존재로서만 보면, 스스로 느껴질 수 있는 존재로만 느낀다. 세제는 단지 활짝 열려진 두뇌에 대해서만 열려 있고 이러한 두뇌의 개방이란 결국 감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 고립되고 폐쇠된 사유 즉 감각이나 인간이 부재하고 인간의 밖에 있는 사유는 절대적인 주관이며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대상이나 존재로, 나아가는 통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 그것은 마치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가 파지 수단인 감관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을 소유한다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를 찾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6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50 항 ]
새로운 철학의 대상인 현실성에서 전체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또한 현실적이고 전체적인 본질에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이 인식원리 즉 주어로 삼는 것은 자아나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정신 즉 추상적인 이성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전체적인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만이 이성의 실재성이고 주어이다. 자아나 이성이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유한다. 새로운 철학은 그러므로 이성 자체의 진리인 신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 인간의 진리인 신성에 의존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성에 의존하나 인간적인 본질을 본질로 하는 이성에 의존한다. 즉 핵심이 없고 색깔이 없고 이름이 없는 이성에게 아니라 인간의 피로 물 들여진 이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옛 철학이 "이성적인 것만이 진리요 현실이다"라고 말하는데 반해 새로운 철학은 "인간적인 것만이 진리요 현실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만이 이성적이고 인간만이 이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5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9 항 ]
참다운 인식을 지탱해주는 규정은 대상을 항상 대상 자체를 통해서 규정하는 규정들이다. 그것은 자체의 개별적인 규정들 이고 대상을 규정하지 못하는 논리학적, 형이상학적인 규정에서와 같은 보편적인 규정들이 아니다. 보편적인 규정들은 구분없이 모든 대상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아주 정당하게 논리학적, 형이상학적인 규정들을 대상의 규정으로부터 독자적인 규정 - 개념의 자기 규정 - 으로 변화시켰고 고대 형이상학에서 술어였던 것을 주어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에 신성하고 자족(自足)한 학문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구체적인 자연과학 속에서도 고대 형이상학에서 처럼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음영이 실제 사물의 규정으로 된 것은 모순이다. 이런 혼돈은 구체적이고 대상 자체에서 나타나는 적절한 규정들이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제 규정과 결합되든가 아니면 대상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완전히 추상적인 규정으로 환원될 때만 가능하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4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8 항]
현실적인 것은 사유 속에서 완전히 표현되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표현된다. 현실과 사유의 이러한 차이는 정상적이며 사유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즉 사유의 본질은 보편성이고 이에 반해 현실의 본질은 개체성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사유된 것과 현실적인 것의 명백한 모순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사유가 일직선으로 스스로와 일치되어 진전하지 않고 감성적인 직관에 의해 중단되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감성에 의해 규정되고 수정되는 사유만이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사유이며 객관적인 진리를 가져오는 사유이다.
절대적인 그러므로 고립되고 감성에서 유리된 사유는 자체와의 일치라는 형식적인 동일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유나 개념이 곧장 상반적 규정들의 통일이라고 규정되지만 이러한 규정 자체가 다시 추상화나 사유규정이 될 뿐이다. 즉 사유가 스스로와 일치하게 되고 동일성이 반복되며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의 출발점으로 생각된다. 이념이 대면해 있는 타자는 이념에 의해서 설정된 것으로 참되지 않으며 실재적으로 이념과 구분되지 않으며 이념 밖으로 이탈할 수가 없고 기껏해야 형식상으로 이탈되는 것처럼 생각되어 이념의 관용성을 전시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념의 타자 자체가 다시 이념이 되고 아직 이념의 형식으로는 설정되지 않지만 이념으로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사유 전체는 단독으로 스스로와 실제로 구분되고 상반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렇게 때문에 사유가 설정하는 진리의 척도란 이런것이 이념이나 사유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밖에 없다. 즉 사유된 진리가 참된 진리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수 있는 형식적이고 주관적인 척도 밖에 갖지 못한다. 이것을 내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척도는 직관뿐이다. 다른편에도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러나 바로 감성적 직관이 사유의 반대편이다.
직관은 사물을 광의로 받아 들이고 사유는 혐의로 받아들인다. 직관은 사물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고 사유는 사물에 법칙을 주지만 때로 너무 독단적이다. 직관은 두뇌를 계몽하지만 규정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며 사유는 결정을 하고 종종 두뇌까지도 국한시킨다. 직관은 스스로에 대해 상반성이 없고 사유는 스스로에 대해 생명이 없다. 규칙은 사유의 본분이고 규칙으로부터의 예외는 직관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사유에 의해서 규정된 직관이 참된 직관인것 처럼 반대로 직관에 의해서 확충되고 개방되는 사유만이 참된 사유이고 현실의 본질에 합당한 사유이다.
스스로와 일치되고 영속적인 사유는 현실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세계를 하나의 중심을 향해 원(圓) 운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동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는 직관의 변칙으로 간섭받는 사유는 이러한 원운동을 사실과 맞게 타원운동으로 바꾼다. 원은 스스로에 의거하는 사변철학의 심벌이고 문장(紋章)이다. 유성에 관해서는 경험을 토대로 원 운동의 궤도가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운동은 아니다"라고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철학 역시 주지하듯 원중(圓中)의 원(圓)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타원은 직관에 의거하는 사유를 내세우는 감성철학의 심벌이고 문장(紋章)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3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5 항]
사물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날 때와 다르게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사유 속에서도 역시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사유나 이념 -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지적 세계 - 이 현실법칙으로 부터 예외라는 것은 신학적인 자의(姿意)의 특권일 뿐이다. 현실성의 법칙은 역시 사유의 법칙이다.
[ 제 46 항 ]
서로 상반된 제 규정에 대한 직접적인 통일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고 타당하다. 현실속에서는 이러한 상반성이 항상 중간물을 통해서 결부되어 있다. 이 중간물이 대상 즉 상반성의 주어다.
그러므로 이 상반된 술어의 통일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단지 그들의 대상이나 주어로부터 추상하기만 하면 된다. 대상이 사라지면 상반성의 한계도 사라진다. 그들은 이제 기반이나 내용이 없어지고 직접 서로 결부된다. 예를 들어 내가 존재를 단지 추상 속에서 관찰하고 존재하는 모든 규정성으로부터 추상하면 남는 것은 결국 무와 같은 존재이다. 규정상만이 존재와 무 사이를 구분하고 한계 지운다. 내가 존재하는 어떤 내용을 제쳐버릴 때 아직도 단순히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반대나 일치에 해당하는 것이 역시 사변철학에서의 다른 반대나 일치에도 해당된다.
[ 제 47 항 ]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제 규정을 현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본질속에 통일하는 수단은 시간 뿐이다. 적어도 생물체에서는 그러하다. 지금 이런 규정이 -이런 지각 혹은 이런 의도가- 나타나고 또 곧 그와 상반되는 다른 규정이 내 생각을 꼭 채우고 지배하는 모순이 예컨데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하나의 표상이 다른 표상을, 하나의 지각이 다른 지각을 배제하는 곳에, 어떤 결단이나 지속적인 규정에 도달되지 않는 곳에, 영혼이 서로 반대되는 상태 사이에 계속적인 변전을 겪는 곳에서만 영혼은 모순이라는 지옥같은 고통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내가 서로 상반되는 규정을 나 안에서 통일한다면 그들은 중성화 되고 무디게 될 것이다. 마치 화학실험에서 반대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할 때 그 차이가 중성화되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강렬하게 원하고 되려고 하는 것을 다음 순간에 강렬하게 부정한다는 사실, 긍정과 부정이 연속된다는 사실, 두개의 상반성이 서로 다른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완전한 규정과 예리함 속에서 나를 자극한다는 사실 속에서 바로 모순의 고통이 있다.
[ 제 45 항]
사물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날 때와 다르게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사유 속에서도 역시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사유나 이념 -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지적 세계 - 이 현실법칙으로 부터 예외라는 것은 신학적인 자의(姿意)의 특권일 뿐이다. 현실성의 법칙은 역시 사유의 법칙이다.
[ 제 46 항 ]
서로 상반된 제 규정에 대한 직접적인 통일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고 타당하다. 현실속에서는 이러한 상반성이 항상 중간물을 통해서 결부되어 있다. 이 중간물이 대상 즉 상반성의 주어다.
그러므로 이 상반된 술어의 통일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단지 그들의 대상이나 주어로부터 추상하기만 하면 된다. 대상이 사라지면 상반성의 한계도 사라진다. 그들은 이제 기반이나 내용이 없어지고 직접 서로 결부된다. 예를 들어 내가 존재를 단지 추상 속에서 관찰하고 존재하는 모든 규정성으로부터 추상하면 남는 것은 결국 무와 같은 존재이다. 규정상만이 존재와 무 사이를 구분하고 한계 지운다. 내가 존재하는 어떤 내용을 제쳐버릴 때 아직도 단순히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반대나 일치에 해당하는 것이 역시 사변철학에서의 다른 반대나 일치에도 해당된다.
[ 제 47 항 ]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제 규정을 현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본질속에 통일하는 수단은 시간 뿐이다. 적어도 생물체에서는 그러하다. 지금 이런 규정이 -이런 지각 혹은 이런 의도가- 나타나고 또 곧 그와 상반되는 다른 규정이 내 생각을 꼭 채우고 지배하는 모순이 예컨데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하나의 표상이 다른 표상을, 하나의 지각이 다른 지각을 배제하는 곳에, 어떤 결단이나 지속적인 규정에 도달되지 않는 곳에, 영혼이 서로 반대되는 상태 사이에 계속적인 변전을 겪는 곳에서만 영혼은 모순이라는 지옥같은 고통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내가 서로 상반되는 규정을 나 안에서 통일한다면 그들은 중성화 되고 무디게 될 것이다. 마치 화학실험에서 반대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할 때 그 차이가 중성화되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강렬하게 원하고 되려고 하는 것을 다음 순간에 강렬하게 부정한다는 사실, 긍정과 부정이 연속된다는 사실, 두개의 상반성이 서로 다른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완전한 규정과 예리함 속에서 나를 자극한다는 사실 속에서 바로 모순의 고통이 있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4 항]
시간과 공간은 단순한 현상형식이 아니다 - 그들은 사유나 존재의 본질조건이고 이성형식이고 법칙들이다.
현존이 최초의 존재이고 최초의 규정된 존재이다. 여기 내가 있다 - 이것이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본질에 대한 최초의 표식이다. 가리키는 손가락은 무와 유를 구분하는 이정표이다. 여기에 최초의 한계선 즉 최초의 구분이 있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저기 있다 ; 우리는 서로 달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둘이 될 수 있다. 자리는 충분하다. 태양은 수성이 있는 곳에 있지 않고 수성은 금성이 있는 곳에 있지 않으며 눈은 귀가 있는 곳에 있지 않다. 공간이 없는 곳에는 어떤 체제도 자리잡을 수 없다. 위치규정이 모든 다른 규정이 발붙일 수 있는 최초의 이성적인 규정이다. 다양한 위치로 분배하는 것 - 다양한 위치는 공간과 직접 연관된다 - 과 더불어 유기적인 자연이 시작된다. 공간속에서만 이성이 방향을 얻게 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의식이 눈뜨기 시작하는 질문 즉 삶의 지혜에 대한 최초의 질문이다. 시간과 공간 속의 한정이 최초의 덕(德)이고 위치의 구분이 우리가 어린애나 미숙한 인간에게 붙여주는 미숙련과 숙련 사이의 최초의 구분이다. 미숙한 인간에게는 위치가 상관없고 아무 구별없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것을 행한다 ; 바보와 같다. 그러므로 바보들은 다시 시간과 공간에 부착됨으로써 이성적이 된다. 다양한 것을 다양한 장소에 놓을 수 있고 질적으로 다른것을 공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모든 경제학의 조건이며 정신적인 것의 조건도 된다. 주(註)에 해당하는 것을 본문에 넣지 않고 끝에 와야 될 것을 처음에다 붙이지 않는 즉 공간적으로 구분하고 한계를 지우는 일이 역시 작가의 지혜에 속한다.
여기서 항상 일정한 장소가 언급되지만 고려되는 것은 장소의 규정에 불과하다. 현실적인공간을 파악하려고 할 대 나는 공간으로부터 장소를 분리할 수 없다. '어느 곳'이라는 말과 더불어 공간이라는 개념이 발생한다. '어디에?' 라는 물음은 일반적이며 모든 장소에 구분없이 해당된다. 그러나 '어느 곳'은 일정하다. '이 곳'과 더불어 '저 곳'이, 장소의 규정과 더불어 그러므로 동시에 공간의 일반성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공간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은 장소의 규정성과 결부될 때만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 된다. 헤겔은 자연일반에 대해서 처럼 공간에 대해서 단지 부정적인 규정만을 부여한다. 단지 '여기의 존재'만이 긍정적이다. 나는 여기에 있으므로 저기에 있지 않다 - 이러한 '저기에 있지 않음'은그러므로 단지 긍정적이고 명확한 '여기에 있음'의 결과이다. 여기가 저기가 아니고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밖에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표상에 대한 제한일 뿐이고 제한 자체는 아니다. 존재해야 되고 이성에 모순되지 않으며 합당한 것은 '서로 서로 다르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 이러한 '서로 서로 다르게 있는 것'은 하나의 부정적인 규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서로 달리 있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의 '달리 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와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논리적 개념이 진리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이 바로 이념과 이성의 부정이며 단지 그것이 재차 부정됨으로써만 다시 이성이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이 이성의 부정이라는 사실을 제쳐 놓고라도 이념이나 이성이 설 자리는 단지 공간에서 이며 공간은 이성의 제 1영역이다. 공간적인 '서로 다름'이 없을 때는 역시 논리적인 '서로 다름'도 없다. 혹은 반대로 - 우리가 헤겔처럼 논리로부터 출발해서 공간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 구분이 없는 곳에는 역시 공간도 없다. 사유 속의 구분은 구분되는 것들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분되는 것은 공간적으로 서로 분리해서 나타난다. 공간적인 '서로 다르게 있음'이 그러므로 비로소 논리적인 구분의 진리이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있는 것은 역시 시간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도어질 수가 있다. 실제적인 사유는 공간과 시간 속의 사유이다. 공간과 시간(시간의 길이)의 부정은 항상 공간과 시간 자체 안에서 이루어 진다. 공간과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을 절약하기만 하면 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1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3 항]
감각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다 라는 말은 사변철학이 의미하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이 속되고, 빤하고, 생각없고 그 자체로서 이해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직접적으로 감각적인 직관은 오히려 표상이나 환상보다도 후에 온다. 인간의 최초의 직관 자체가 표상이나 환상의 직관일 뿐이다. 철학이나 과학일반의 과제는 그러므로 감각적인 즉 실제적인 사물들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로 돌아오는데 있으며 대상을 사유나 표상으로 바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즉 대상화 시키는데 있다.
인간은 사물을 우선 그들에게 나타나는대로 보며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사물 속에서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상상을 볼 뿐이다. 사물속에서 스스로의 본질을 집어넣어 대상과 그에 대한 표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도야되지 않고 주관적인 인간에게는 표상이 직관보다 더 가깝다. 왜냐하면 직관에서 그는 자신에게로부터 벗어나지만 표상에서는 자신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도 표상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지상의 인간적인 사물보다도 천상의 신적인 사물과 훨씬 더 오래 관계한다. 즉 원래의 있는 그대로의 사물 보다도 사유 속으로 전환된 사물과 훨씬 더 잘 그리고 오래 관계한다. 근세에서 비로소 인간은 다시 마치 한 때 희랍이 동방의 한상에게로 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감각적인 즉 왜곡되지 않고 객관적인 감성의 직관으로 말하자면 현실적인 것의 직관으로 나아갔는데 이렇게 되어 비로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 왜냐하면 상상이나 추상적인 사유의 본질과 관계하는 사람은 스스로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존재일 뿐이며 결코 현실적이며 진실로 인간적인 존재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재성은 대상의 실재성에 의존한다. 그대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면 그대는 바로 무(無)인 것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30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2 항]
본질과 가상, 원인과 결과, 실체와 속성, 필연과 우연, 사변과 경험 사이의 구분은 두개의 영역이나 세계 즉 본질이 속하는 초감각적인 세계와 가상이 속하는 감각적인 세계의 구분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이 구분은 감각 자체의 영역내에 속한다.
자연과학에서 한 예를 들어보자. 린네의 식물계 안에서는 최초의 속(屬)들이 꽃실의 수에 따라서 규정된다. 그러나 12~20의 꽃실이 나타나는 열 한번째 속(屬)에서는 수에 의한 규정이 상관없어진다. 더 이상 그 수가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동일한 영역에서 일정하고 일정하지 않는, 필연적이고 필연적이 아닌,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의 구별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감성의 한계를 넘지 않고서도 감성적인 것의 한계 즉 절대적인 철학이 말하는 경험적인 것의 한계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오성을 감각과 분리하지 않고서도 초감각적인 것 즉 정신이나 이성을 감각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9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41 항]
감각에 대해서 대상이 되는 것은 외부의 사물만이 아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만 스스로 대상이 되고 감각대상으로서만 스스로의 대상이 된다. 주관과 객관의 일치가 자의식 속에서는 추상적인 사고에 불과하나 인간에 대한 감각적인 직관에서는 진리와 현실이 된다.
우리는 돌이나 나무토막, 살이나 뼈 뿐만 아니라 느끼고 있는 다른 사람의 손이나 입술을 누르면서 그 느낌도 역시 지각한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영적인 목소리도 듣는다. 우리는 수면이나 색의 조화를 볼 뿐만아니라 사람의 시선도 응시한다. 외적인 것 뿐 아니라 내적인 것도,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도, 물체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감각의 대상이다. 비록 직접적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속되고 거친 감각이 아니고 도야된 감각으로, 해부학자나 화학자의 눈으로가 아니고 철학자의 눈으로 지각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모든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론이 우리의 관념의 근원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 것은 정당하다. 다만 경험론은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감각 대상이 인간과 자신 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대한 시선 속에서만 의식과 오성의 빛이 점화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관념론이 인간 속에서 관념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나 고립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본질 혹은 영혼으로 고정된 인간으로부터 그것을 도출하려는 것은 부당하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타아가 없는 자아로 부터 그것을 도출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전달 혹은 대화를 통해서만 관념은 발생한다. 인간은 혼로가 아니라 둘이서만 개념이나 이성 일반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하나의 인간을 산출하는데는 두 인간이 필요하다 ; 인간의 인간과의 교제는 진리와 보편성의 제 1 원칙이고 척도이다. 나의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에 대한 확신까지도 나의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이루어 진다. 나 혼자 본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있지만 타인도 역시 본 것은 비로소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8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9 항]
옛날의 절대적인 철학은 감각을 단지 현상과 유한성의 영역을 추방해 버렸다. 그 대신 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을 예술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예술의 대상은 그러나 - 간접적으로 언어예술에서, 직접적으로 조형예술에서 - 시가, 청각, 촉각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유한하고 현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참되고 신성한 본질도 절대적인 것의 기관인 감각의 대상이 된다. 예술은 "진리를 감성 속에서 표현한다" -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서 표현하면 "예술은 감성의 진리를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 제 40 항]
예술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러하다. 표상이 아니라 감각적 직관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 이것이 최고의 신성한 본질형식이고 기관이다. 그러나 감각적 직관이 신성하고 참된 본질의 기관으로 인정되는 곳에 신적인 본질은 감각적인 것으로, 감각적인 본질은 신적인 것으로 말해지고 인정된다. 왜냐하면 주관과 객관은 똑 같기 때문이다.
"말씀이 살이 되어 우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영광을 보았다" 단지 후예들에게만 기독교의 대상은 표상과 상상력의 대상이다 ; 그러나 근원적인 직관이 다시 재생된다. 예수는 하늘나라에 있고 신은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직관의 대상이다. 거기서 신은 표상, 사유의 대상 즉 여기 우리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존재로부터 하나의 감각적이고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직관이 기독교의 출발이고 목표이고 본질이다. 사변철학은 그러므로 예술과 종료를 그 참된 빛 즉 현실성이라는 빛 속에서가 아니고 반사된 어둠속에서 파악하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으로부터 츠상하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감성을 하나의 형식규정성으로 제체 놓았기 때문이다 ; 예술은 감가적 직관의 형식규정성 속에 있는 신이고 종교는 표상의 형식규정성 속에 있는 신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찰에 대해서 하나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 본질이다. 신이 불 속에서 나타나고 경배되는 곳에는 실제로 불이 신으로 경배된다. 불 속의 신이란 그 작용이나 특성으로 인간을 놀라게 하는 불의 본질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 속에서 신이란 인간 본질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똑 같이 예술이 감성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 형식으로 부터 분리될 수 없는 감성 자신의 본질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7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8 항]
참되고 신성한 것은 다만 어떤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직접 자기 자신을 통해서 확실한 것, 직접 그 자체로 증명되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직접 야기시키는 것 - 철저하게 구분되고 의심할 여지가 없고 명약관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만이 명약관화하다. 감성이 시작되는 곳에만 모든 의심이나 논쟁이 멈춘다. 직접적인 지식의 비밀은 감성이다.
모든 것은 간적적이다 라고 헤겔철학은 말한다. 그러나 간접적이 아니고 직접적일 때만 어떤 것이 진리가 된다. 이전에는 다만 사유된 것, 간접적이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확신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만, 즉 이전에는 생각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 진리가 되는 곳에서만 획기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간접적인 것을 신적인 필연성으로, 진리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만든 것은 스콜라철학이다. 그 필연성이라는 것도 하나의 조건화된 것에 불과하다 ; 그것은 잘못된 전제가 기초되어 있는 곳에서만 필연적이며 하나의 진리나 이론이 아직도 참된 것으로 인정되고 존경을 받는 다른 하나의 이론과 여기서 모순된다. 중재되는 진리는 아직 그 반대와 연결된 진리다. 이런 진리는 반대와 더부어 시작되나 그 후에 폐기된다. 폐기되고 부정되어야 할 것이라면 왜 그것에서 시작해야 하고 곧장 그 부정과 더불어 시작해서는 안되는가? 하나의 예가 있다. 신으로서의 신은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이다. 신은 세계와 인간을 향해 특수화되고 규정되고 실현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본질이 부정될 때만 신은 구체화 된다. 그러나 왜 나는 구체적인 것과 더불어 곧장 시작해서는 안되는가? 왜 도대체 그 자체로 확실하고 참된 것이 다른 것 (즉 스스로와 반대되는 것이 무이기 때문에 확실 해지는 것) 보다 더 고귀해서는 안되는가? 그러므로 누가 간접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즉 진리의 법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 다만 스스로 부정되어야 될 것에 얽매이고 스스로와 투쟁하며 다투고 스스로와 완전한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 하는 사람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단순한 재능 즉 그것이 탁월한 능력일지라도 부분적인 인간사(人間事)에 속하고 전 인류의 관심이 되는 천재의 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천재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이다. 재능이 두뇌에 갖고 있는 것을 천재는 살과 피속에 담고 있다. 즉 재능에게 다만 사유의 대상인 것이 천재에게는 감각의 대상이 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6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6 항]
옛 철학은 그 출발점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가졌다 ; 나는 추상적이고 단지 사유하는 존재며 육체는 나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새로운 철학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시작한다 ; 나는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이며 육체는 나의 본질에 속한다. 육체는 총체적으로 나의 자아이고 나의 본질 자체이다. 그러므로 옛 철학은 감각적인 상상들을 억누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불순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감각과 투쟁하거나 모순을 이루면서 사유했다.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해 감각과 일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 사유한다. 고대철학은 존재를 내포하고 있는 신의 개념속에서도 감성의 진리를 고백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재는 사유된 것과 구분되고 정신과 사유 밖에 있으며, 실제로 객과넉인 즉 존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 단지 은밀하게, 추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해 상상의 진리를 즐거움속에서 의식적으로 인정한다. 새로운 철학은 숨김 없는 감성적 철학이다.
[ 제 37 항 ]
근세 철학은 직접 확실한 것을 구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밑받침없고 근거 없는 스콜라 철학의 사유를 팽개치고 철학을 자의식 위에 구속했다. 즉 근세철학은 사유되는 본질일 뿐이며 모든 스콜라철학의 최고 최종 본질인 신 대신에 사유하는 본질, 자아, 자의식의 정신을 대치시켰다. 왜냐하면 사유가 사유된 것보다 사유하는 자에게 훨씬 더 가깝고 현실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는 의심스럽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의심스럽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나, 나는 생각한다는 것, 나는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근세철학의 자의식은 그러나 또다시 사유되고 추상을 통해서 중계되고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가 있는 본질일 뿐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고 직접적으로 확실한 것은 감각, 직관,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 뿐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5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4 항]
새로운 철학은 사랑의 진리, 지각의 진리를 밑받침으로 한다. 사랑이나 지각 일반 속에서 모든 사람은 새로운 철학의 진리를 고백한다. 새로운 철학은 그 기초와 연관해서 볼 때 지각의 본질이 의식으로 고조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철학은 모든 인간 - 현실적인 인간 - 이 마음속으로 인정한 것을 이성속에서 인정하고 이성과 더불어 긍정한다. 새로운 철학은 오성으로 변화된 마음이다. 마음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인 대상이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과 본질을 원한다.
[ 제 35 항]
사유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대 철학이 말하는데 반해서 새로운 철학은 사랑받지 않고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은 그러나 경외될 수도 없다. 종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만이 철학의 대상이 된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사랑이 존재의 척도이고 진리와 현실성의 척도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진리도 없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자만이 어떤 존재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동일하다. 한 사람이 더 많이 존재하면 존재할 수록 그는 더 많이 사랑하며 더 많이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더 많이 존재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4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3 항]
새로운 철학은 사유자이며 동시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우리 앞에 나타나는 존재를 그대로 관찰하고 고려한다. 즉 존재를 존재의 대상으로, 자기자신의 대상으로 관찰한다. 존재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는 감각, 직관, 지각, 사랑의 존재이며 이러한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이고 존재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가치가 있다. 존재는 그러므로 직관과 지각과 사랑의 비밀이다.
지각과 사랑 속에서만 이 사랑, 이 것 등에서의 '이-' 즉 개별자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이고 여기에 유일하게 사랑의 무한한 깊이와 신성과 진리가 있다. 사랑 속에서만 머리털을 하나하나 세는 신, 진리, 실재성이 있다. 기독교 신 자체가 인간적인 사랑의 한 추상이고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가 사랑속에서만 절대적 가치를 가지므로 추상적 사유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 속에서만 존재의 비밀이 열린다. 사랑은 정열이고 정열만이 실존의 참된 표시이다. 현실적이든 가능한 것이든 정열이 대상이 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지각이 없고 정열이 없는 추상적인 사유는 존재와 무 사이의 구분을 해결하지 못하며 사유에서 불가능한 이러한 구분이 사랑에서 실재성으로 나타난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구분을 확신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대상이야 어떻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이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서만, 지각을 통해서만 일반적으로 존재가 무와 구분되는 것처럼 하나의 대상도 사랑을 통해서만 나와 구분되어진다. 고통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일치에 대한 소리높은 항변이다. 사랑의 고통은 상상속에 있는 것이 현실속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속에서는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이 되고 표상이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고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며 비진리이고 불행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일치하지 않는 참된 관계의 부활이 요구된다. 동물적인 고통까지도 분명히 이러한 차이를 나타낸다. 굶주림의 고통은 위 속에 어떤 대상적인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 위(胃)의 대상은 바로 위 자체라는 것, 텅빈 위벽들이 하나의 음식물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끼리 서로 마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할 뿐이다. 인간적인 지각은 그러므로 고대 초월철학의 의미에서와 같은 경험적이고 인간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 지각 즉 일상적인 지각 속에 가장 심오하고 지고한 진리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의 두뇌 밖에 있는 한 대상의 존재에 대한 참다운 존재론적 증명이 되는 셈이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지각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이 없을 때 고통을 느끼는 바로 그것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객관과 주관, 존재와 무 사이의 구분은 즐거움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의 구분이다.
* 종교에서 율법(신앙)과 사랑의 모순성 ; [기독교의 본질]의 제 4장과 제 10장 참조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3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2 항]
실제로 현실적인 것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것으로 현실적인 것은 감각의 대상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며 감각적인 것이다. 진리, 현실성, 감성은 동일하다. 감성적인 본질만이 참되고 현실적인 본질이다. 감각을 통해서만 하나의 대상은 참된 의미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 사유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사유와 함께 주어진 혹은 사유와 동일한 대상은 생각에 불과하다.
하나의 대상 즉 실제적인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나에게 작용하는 어떤 본질이 주어질 때이고 사유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나는 활동성이 다른 본질의 활동성에 제한이나 저항을 느낄때이다. 대상의 개념은 근원적으로 자아의 다른 개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은 유년시절에 모든 사물을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본질로 파악한다 - 그러므로 대상일반의 개념은 타인 즉 대상화되는 자아의 개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피히테의 말을 빌린다면 자아에가 아니라 나 속에 들어 있는 비아(非我)에 대상 즉 다른 자아가 주어진다 ; 왜냐하면 자아로부터 타아로 변화되는 곳에만 즉 내가 고통을 받는 곳에만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활동성이 나 대상성에 대한 표상이 발생한다. 감각을 통해서만 자아는 비아가 된다.
이전의 추상적인 철학을 특징지우는 문제는 어떻게 다양한 독자적인 본질 즉 실체가 - 예컨데 육체가 영혼이나 자아에 작용하는 것 처럼 - 서로 작용을 할 수 있는가 이다. 이 문제는 그러나 감각으로부터 추상화되어 버리고 서로 작용을 해야하는 실체들이 추상적인 본질 즉 순수한 오성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전 철학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감성만이 이러한 상호작용의 비밀을 해결해 준다. 감성적인 본질만이 서로 서로 작용을 한다. 나는 나에 대해서 자아이고 동시에 상대방에 대해서 타아 이다. 그러나 이런 타아는 단지 감각적인 본질로만 가능하다. 추상적인 오성은 그러나 이러한 대자존재(對自存在)를 실체, 원자, 자아, 신으로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오성이 대자 존재를 이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자의(姿意)에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결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다만 감성에서 이고 이 감성에서 추상화된 오성에서가 아니다. 감성이 없이 사유된 것은 이런 모든 연관성이 없거나 혹은 연관성의 밖에서 사유된 것이다. 그러므로 연관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동시에 다시 연관된 것으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단 말인가?
Thursday, April 29,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1 항]
현실성의 빛을 추상이라는 어둠속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그 부정에서 긍정하는 것이 된다. 구체적인 추상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성 속에서, 현실적인 것을 현실속에서 (즉 현실적인 것의 본질에 합당한 방식으로) 진리로 인정하고 철학의 원리와 대상으로 높이는 새로운 철학만이 그러므로 헤겔철학의 진리이고 근대철학 일반의 진리이다.
새로운 철학이 옛 철학에서 발생하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구체적인 개념이나 이념이 헤겔에 의하면 우선 추상적인 사유의 요소 안에만 들어 있다. 그것은 세계 창조 이전의 오성화된 신학적 신이다. 그러나 신이 표현되고 제시되고 세계화되고 현실화되는 것처럼 이념도 실현된다. 헤겔은 하나의 논리적 발전으로 바뀐 신학의 역사이다. 우리가 일단 이념의 실현과 더불어 사실주의 영역에 들어서고 이념이란 현실적이며 실존한다는 이념의 진리를 확신하면 우리는 실존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즉 현실적인 것만이 참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가? 사유된 것만이 현실적인가? 사유와 오성의 대상이 되는 것만이 현실적인가? 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추상적인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가 없다. 플라톤적인 이데아도 역시 사유의 대상이다 ; 천상의 내세도 역시 내면적인 대상이며 믿음과 사상의 대상이다. 사유의 실재성이 사유된것으로서의 실재성이라면 사유의실재성 자체가 다시 사유일 뿐이고 우리는 사유가 그 자체와 동일하게 되는 관념론 속에 머물 뿐이다. - 이 관념론은 모든 현실성의 내용을 포괄해서 하나의 사유규정성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관념론과 구분된다. 그러므로 사유나 이념의 실재성을 참으로 진지하게 추구하려면 사유 그 자체 이상의 어떤 것이 첨가되어야 한다. 즉 실현된 사유로서의 사유는 실현되지 않는 단순한 사유 이상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사유 뿐만아니라 비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유가 현실화된다는 것은 사유가 스스로를 부정한다는 것이고 단순한 생각이 되는 것을 멈춘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비 사유 즉 사유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다. 사유가 실현된다는 말은 그러므로 감각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념의 실재성은 감성이며 이념의 진리는 실재성이다 - 그러므로 비로서 감성이 이념의 진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감성을 다만 술어로 이념이나 사유를 주어로 생각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념이 왜 감성화되는가?
그것은 실재적이 아닐 때 즉 감성적이 아닐 때는 참되지 못하는가? 그렇게 되면 이념의 진리가 감성에 의존하게 되어 버리지 않는가? 이념의 실재성이 되는 외에 감성 그 자체에 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감성이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아니라면 왜 이념은 감성을 필요로 하는가? 이념이 비로소 감성에게 가치와 내용을 준다면 감성이란 사치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이며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유에는 항상 그것이 실현되어야 하고 감성화 되어야 하는 요구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유에는 실재성 즉 사유와 독립해 있는 감성이 진리로서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유는 감성을 통해서 지탱된다 ; 무의식적으로 감성이 진리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늘 의식적으로 사유의 진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감성의 진리가 나중에 말해지고 감성이 이념의 한 속성으로 되어 버리는데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감성은 속성에 불과한다해도 사유에서 비로서 진리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핵심인 동시에 부연이며 본질인 동시에 속성이다. 실제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그 자체의 주어로 만들 때만 또한 그것이 독자적이고, 신적이고, 기초적이고, 이념에 의해서 도출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할 때만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1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30 항]
구체적인 개념 즉 현실적인 자연이 갖고 있는 개념만이 참된 개념이라는 규정은 구체적인 것 혹은 현실적인 것의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곧장 개념 즉 사유의 본질이 절대적이고 유일하게 참된 본질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 혹은 현실적인 것이 단지 간접적인 방식으로 즉 개념의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형용사로만 인정될 수 있다. 헤겔은 실재론자이나 순수한 관념론적 혹은 추상적 실재론자이다. 그는 사유 즉 추상적인 사유를 부정하나 바로 추상적인 사유속이므로 추상성의 부정자체가 바로 다시 추상성이 된다.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만이 철학의 대상이 되나 그것 자체가 단지 추상적이고 사유된 존재이다. 헤겔은 온 힘을 사유속에서 소유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사물을 그 자체로 파악하려고 하나 사물에 대한 생각에서 이고 사물을 벗어나려고 하나 사물 안에서 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개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20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9 항]
타자 - 사유의 타자는 그러나 존재다 -를 포괄하는 사유는 스스로의 자연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다 사유가 그 반대를 포괄한다는 말은 사유가 사유에 속하지 않고 존재에 속하는 것을 되찾으려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존재에 속하는 것은 개별물과 개체이고 사유에 속하는 것은 보편성이다. 사유는 그러므로 개별성의 상환을 요구한다. – 보편성의 부정, 즉 감각의 근본형태인 개별성을 사유의 한 요소로 만든다. 이렇게 존재를 자기 밖에 가지고 있는 추상적 사유 혹은 추상적 개념은 구체적 개념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존재의 특성 속에 사유를 포함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통해서이다. 신 속에서 존재는 직접 본질이나 개념과 결부되고 개별성 즉 실존형식은 보편성과 결부된다. ‘구체적 개념’은 개념화된 신이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어떻게 추상적인 사유에서 구체적 혹은 절대적인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고대 이교도 철학에서 소위 신(新) 플라톤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역사자신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왜냐하면 고대철학이 단지 철학인데 반해 신플라톤 철학은 신학이라는 사실을 통해 양자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고대철학은 이성이나 이념을 그 원리로 하고 있으나 “이념(Idea)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고대철학은 사유 외에 어떤 것 즉 사유 속에 용해되지 않는 어떤 나머지를 존재하게 한다.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 이러한 존재형상이 물질 즉 실재성의 기초이다. 이성은 물질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고대철학은 아직 사유와 존재의 구분 속에 존재했고 사유, 정신, 이념 등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하자면 유일하고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실재성은 아니었다.
고대 철학자들은 아직 현자(賢者) – 생리학자, 정치학자, 동물학자, 다시 말하면 신학자가 아니고 인간학자, 적어도 부분적으로만 신학자 – 였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또한 부분적이고 제한된 불완전한 인간학자였다. 이에 반해 신플라톤 철학자들에게는 물질 혹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일반이 결코 어떤 기준이나 실재성이 되지 못했다. 고대 전환기 철학이 아직 인간의 축복으로 생각한 것 즉 조국, 가정, 세속적 유대관계, 일반재화가 신 플라톤 철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을 육체적인 삶보다도 더 좋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육체를 본질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행복을 모든 육체적인 다시 말하면 외부적인 사물과 분리시켜 단지 영혼 속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외에 어떤 것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발견하며 현실적인 세계 대신에 상상적이고 예지적인 세계를 설정한다. 여기서는 모든 현실적인 것이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플라톤 철학자들에게서는 물질까지도 비물질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이상적이며 사유되고 상상된 어떤 것이다. 인간이 자기밖에 어떤 본질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는 사유 속에 하나의 본질을 설정하는데 이 본질은 사유본질로서 동시에 현실적인 본질의 특성을 가지며, 비감각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본질이며 이론적인 대상인 동시에 실천적인 대상이 된다. 이 본질이 신 즉 신플라톤 학자에게는 최고의 선이다. 인간은 본질 속에서만 만족한다. 현실적인 본질의 결핍을 그는 이상적인 본질로 대치한다. 즉 그는 이제 폐기되고 상실된 현실성의 본질을 상상과 생각 속에 갖다 놓는다. 상상은 이제 상상이 아니고 대상 자체이며 형상은 형상이 아니고 내용 자체이며 생각이나 이념이 현실 자체가 된다. 그는 객관으로 나타나는 현실 세계에 더 이상 주관으로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그의 상상들이 대상이나 본질, 정신, 신 등이 된다. 인간이 추상적이면 추상적이고 실제적인 감각에 대해서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바로 추상 속에서 더욱 감각적이 된다. 모든 다양성과 구분되는 즉 감성으로부터 추상화된 최고의 목적과 본질인 신 혹은 일자(一者)가 접촉되고 직접 나타나면서 인식된다. 가장 낮은 것인 물질이나 가장 높은 것인 일자가 똑같이 미지 혹은 무지를 통해 의식된다. 다시 말하면 단지 사유되고 추상화된, 비감각적이고 초감각적인 본질이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고 감각적인 본질이 된다.
인간이 육체를 벗어나고 주관성의 합리적인 제한인 육체를 부정할 때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실천에 빠져 육체를 가진 신 혹은 혼령과 관계하고 상상과 직관 사이의 구분을 실천적으로 지양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 실재성이 되지 않고 따라서 사유하는 이성의 제한이 되지 못한다. 이성, 지적 본질, 무제한성 속의 주관성 일반의 본질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본질이 되는 곳에 사유와 존재, 주관과 객관, 감성과 비감성 사이의 구분이 이론적으로 사라진다. 사유는 모든 것을 부정하나 다만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 설정하기 위해서다. 그는 자기 외에 어떤 것에서도 한계를 갖지 않는데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의 내재적이고 자연적인 한계를 벗어난다. 이런 방식으로 이성과 이념이 구체적이 된다. 즉 직관이 부여해야 할 것을 사유가 점유하고, 삶의 기능이나 감각의 내용이 되는 것이 사유의 기능과 내용이 되고 구체적인 것이 사유의 술어가 되고 존재가 단순한 사고규정성이 된다. 왜냐하면 개념은 구체적이다라는 명제는 존재는 사고규정성이다라는 명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상상이며 환상적인 것을 헤겔은 개념으로 전환하고 합리화했다. 헤겔은 ‘독일의 혹은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고 독일의 프로클루스(Proclus)이다. ‘절대철학’은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부활이다. 헤겔이 밝힌 규정에 따르면 기독교적인 그러나 이교도적인 요소와 혼합된 절대적인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일반적인 고대 이교도 철학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철학인데 이 철학은 아직 구체적인 자의식에서 추상화된 요소안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신플라톤적인 신학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객관과 주관은 서로 상응하므로 신학의 대상은 주관과 인간의 대상화된 본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지고한 가능성을 지닌 신이 단순한 것, 一者, 전혀 규정되지 않은 것 그리고 구분이 없는 어떤 것이다. 본질이 아니고 본질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본질은 그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 개념이나 오성이 아니고 오성을 갖지 않거나 오성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것이 오성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 오성이 있는 곳에는 사유자와 사유된 것 사이의 구분과 분열이 있고 따라서 완전히 단순한 것 속에서는 그런 구분이 생겨날 수가 없다. 그러나 신 플라톤주의자에게는 객관적으로 최고 존재가 역시 주관적으로 최고 존재다.
이상이나 신 속에서 존재로 생각한 것을 그들은 스스로에서 활동과 노력으로 간주한다. 더 이상 구별이 없고 더 이상 오성이 없고 더 이상 자아가 없는 것이 신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본질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 그들의 활동 목표는 ‘스스로가 되고 오성과 이성이 되는 것’을 멈추는 일이다. 황홀과 환희가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인간 최고의 심리 상태이다. 이 상태가 본질로서 대상화되면 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신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나 그 반대는 아니다. 즉 근본적으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종종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언급되는 결핍이 없고 행복한 본질로서의 신의 규정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고통이 없고 궁핍이 없는 존재가 그 근거나 근원을 인간의 고통이나 궁핍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궁핍과 고통의 필요성과 더불어 행복의 상상과 느낌도 나타난다. 불행에 대한 반대로서만 행복은 실재성을 갖는다. 인간의 고통 속에서만 신은 탄생한다. 신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그의 모든 규정을 얻는다.
신의 본질이란 인간이 원하고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불과 하다 – 현실적인 본질로 상상된 인간자신의 본질이고 인간 자신의 목표다. 이 점에서 신 플라톤주의자가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쿠로스학파 혹은 회의론자와 구분된다 ; 무정열, 핵복, 불욕(不慾), 자유, 독립 등이 이 철학자들의 목표이다 ; 그러나 그 목표는 단지 인간의 덕으로만 존재한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이 진리의 근거가 되며 자유와 행복은 이러한 근거에 대한 술어로 나타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그러나 비록 이교도의 덕이 진리가 되었지만- 그러므로 행복 및 인간의 완전성과 신성을 내세로 갖다 놓는 기독교 신학과 구분되는데 – 술어가 주어로, 인간의 형용사가 명사로, 실제적인 본질로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인간이 피와 살이 없이 단순한 추상물로, 신적 본질의 비유적인 형상으로 변했다. 적어도 그의 자서전적 서술에 따르면 플로틴은 그가 육체를 가진데 대해서 부끄러워 했다.
* "고대철학에서는 신보다는 아직 인간의 축복으로 생각한 것 : 즉 조국, 가정, 세속적 유대관계, 일반재화가 중요시 되었다" ; 대표적인 중국의 고대철학- 공자의 철학
* 신플라톤주의 : 그 철학은 원래 발생한 원산지가 아닌 변방을 에둘러서 발전하였는데 그 새로운 자궁은 아랍지역의 이슬람학자들 이었다라는...
[ 제 29 항]
타자 - 사유의 타자는 그러나 존재다 -를 포괄하는 사유는 스스로의 자연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다 사유가 그 반대를 포괄한다는 말은 사유가 사유에 속하지 않고 존재에 속하는 것을 되찾으려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존재에 속하는 것은 개별물과 개체이고 사유에 속하는 것은 보편성이다. 사유는 그러므로 개별성의 상환을 요구한다. – 보편성의 부정, 즉 감각의 근본형태인 개별성을 사유의 한 요소로 만든다. 이렇게 존재를 자기 밖에 가지고 있는 추상적 사유 혹은 추상적 개념은 구체적 개념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존재의 특성 속에 사유를 포함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통해서이다. 신 속에서 존재는 직접 본질이나 개념과 결부되고 개별성 즉 실존형식은 보편성과 결부된다. ‘구체적 개념’은 개념화된 신이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어떻게 추상적인 사유에서 구체적 혹은 절대적인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고대 이교도 철학에서 소위 신(新) 플라톤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역사자신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왜냐하면 고대철학이 단지 철학인데 반해 신플라톤 철학은 신학이라는 사실을 통해 양자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고대철학은 이성이나 이념을 그 원리로 하고 있으나 “이념(Idea)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고대철학은 사유 외에 어떤 것 즉 사유 속에 용해되지 않는 어떤 나머지를 존재하게 한다.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 이러한 존재형상이 물질 즉 실재성의 기초이다. 이성은 물질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고대철학은 아직 사유와 존재의 구분 속에 존재했고 사유, 정신, 이념 등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하자면 유일하고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실재성은 아니었다.
고대 철학자들은 아직 현자(賢者) – 생리학자, 정치학자, 동물학자, 다시 말하면 신학자가 아니고 인간학자, 적어도 부분적으로만 신학자 – 였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또한 부분적이고 제한된 불완전한 인간학자였다. 이에 반해 신플라톤 철학자들에게는 물질 혹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일반이 결코 어떤 기준이나 실재성이 되지 못했다. 고대 전환기 철학이 아직 인간의 축복으로 생각한 것 즉 조국, 가정, 세속적 유대관계, 일반재화가 신 플라톤 철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을 육체적인 삶보다도 더 좋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육체를 본질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행복을 모든 육체적인 다시 말하면 외부적인 사물과 분리시켜 단지 영혼 속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외에 어떤 것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발견하며 현실적인 세계 대신에 상상적이고 예지적인 세계를 설정한다. 여기서는 모든 현실적인 것이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플라톤 철학자들에게서는 물질까지도 비물질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이상적이며 사유되고 상상된 어떤 것이다. 인간이 자기밖에 어떤 본질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는 사유 속에 하나의 본질을 설정하는데 이 본질은 사유본질로서 동시에 현실적인 본질의 특성을 가지며, 비감각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본질이며 이론적인 대상인 동시에 실천적인 대상이 된다. 이 본질이 신 즉 신플라톤 학자에게는 최고의 선이다. 인간은 본질 속에서만 만족한다. 현실적인 본질의 결핍을 그는 이상적인 본질로 대치한다. 즉 그는 이제 폐기되고 상실된 현실성의 본질을 상상과 생각 속에 갖다 놓는다. 상상은 이제 상상이 아니고 대상 자체이며 형상은 형상이 아니고 내용 자체이며 생각이나 이념이 현실 자체가 된다. 그는 객관으로 나타나는 현실 세계에 더 이상 주관으로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그의 상상들이 대상이나 본질, 정신, 신 등이 된다. 인간이 추상적이면 추상적이고 실제적인 감각에 대해서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바로 추상 속에서 더욱 감각적이 된다. 모든 다양성과 구분되는 즉 감성으로부터 추상화된 최고의 목적과 본질인 신 혹은 일자(一者)가 접촉되고 직접 나타나면서 인식된다. 가장 낮은 것인 물질이나 가장 높은 것인 일자가 똑같이 미지 혹은 무지를 통해 의식된다. 다시 말하면 단지 사유되고 추상화된, 비감각적이고 초감각적인 본질이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고 감각적인 본질이 된다.
인간이 육체를 벗어나고 주관성의 합리적인 제한인 육체를 부정할 때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실천에 빠져 육체를 가진 신 혹은 혼령과 관계하고 상상과 직관 사이의 구분을 실천적으로 지양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 실재성이 되지 않고 따라서 사유하는 이성의 제한이 되지 못한다. 이성, 지적 본질, 무제한성 속의 주관성 일반의 본질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본질이 되는 곳에 사유와 존재, 주관과 객관, 감성과 비감성 사이의 구분이 이론적으로 사라진다. 사유는 모든 것을 부정하나 다만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 설정하기 위해서다. 그는 자기 외에 어떤 것에서도 한계를 갖지 않는데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의 내재적이고 자연적인 한계를 벗어난다. 이런 방식으로 이성과 이념이 구체적이 된다. 즉 직관이 부여해야 할 것을 사유가 점유하고, 삶의 기능이나 감각의 내용이 되는 것이 사유의 기능과 내용이 되고 구체적인 것이 사유의 술어가 되고 존재가 단순한 사고규정성이 된다. 왜냐하면 개념은 구체적이다라는 명제는 존재는 사고규정성이다라는 명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상상이며 환상적인 것을 헤겔은 개념으로 전환하고 합리화했다. 헤겔은 ‘독일의 혹은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고 독일의 프로클루스(Proclus)이다. ‘절대철학’은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부활이다. 헤겔이 밝힌 규정에 따르면 기독교적인 그러나 이교도적인 요소와 혼합된 절대적인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일반적인 고대 이교도 철학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철학인데 이 철학은 아직 구체적인 자의식에서 추상화된 요소안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신플라톤적인 신학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객관과 주관은 서로 상응하므로 신학의 대상은 주관과 인간의 대상화된 본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지고한 가능성을 지닌 신이 단순한 것, 一者, 전혀 규정되지 않은 것 그리고 구분이 없는 어떤 것이다. 본질이 아니고 본질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본질은 그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 개념이나 오성이 아니고 오성을 갖지 않거나 오성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것이 오성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 오성이 있는 곳에는 사유자와 사유된 것 사이의 구분과 분열이 있고 따라서 완전히 단순한 것 속에서는 그런 구분이 생겨날 수가 없다. 그러나 신 플라톤주의자에게는 객관적으로 최고 존재가 역시 주관적으로 최고 존재다.
이상이나 신 속에서 존재로 생각한 것을 그들은 스스로에서 활동과 노력으로 간주한다. 더 이상 구별이 없고 더 이상 오성이 없고 더 이상 자아가 없는 것이 신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본질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 그들의 활동 목표는 ‘스스로가 되고 오성과 이성이 되는 것’을 멈추는 일이다. 황홀과 환희가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인간 최고의 심리 상태이다. 이 상태가 본질로서 대상화되면 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신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나 그 반대는 아니다. 즉 근본적으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종종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언급되는 결핍이 없고 행복한 본질로서의 신의 규정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고통이 없고 궁핍이 없는 존재가 그 근거나 근원을 인간의 고통이나 궁핍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궁핍과 고통의 필요성과 더불어 행복의 상상과 느낌도 나타난다. 불행에 대한 반대로서만 행복은 실재성을 갖는다. 인간의 고통 속에서만 신은 탄생한다. 신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그의 모든 규정을 얻는다.
신의 본질이란 인간이 원하고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불과 하다 – 현실적인 본질로 상상된 인간자신의 본질이고 인간 자신의 목표다. 이 점에서 신 플라톤주의자가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쿠로스학파 혹은 회의론자와 구분된다 ; 무정열, 핵복, 불욕(不慾), 자유, 독립 등이 이 철학자들의 목표이다 ; 그러나 그 목표는 단지 인간의 덕으로만 존재한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이 진리의 근거가 되며 자유와 행복은 이러한 근거에 대한 술어로 나타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그러나 비록 이교도의 덕이 진리가 되었지만- 그러므로 행복 및 인간의 완전성과 신성을 내세로 갖다 놓는 기독교 신학과 구분되는데 – 술어가 주어로, 인간의 형용사가 명사로, 실제적인 본질로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인간이 피와 살이 없이 단순한 추상물로, 신적 본질의 비유적인 형상으로 변했다. 적어도 그의 자서전적 서술에 따르면 플로틴은 그가 육체를 가진데 대해서 부끄러워 했다.
* "고대철학에서는 신보다는 아직 인간의 축복으로 생각한 것 : 즉 조국, 가정, 세속적 유대관계, 일반재화가 중요시 되었다" ; 대표적인 중국의 고대철학- 공자의 철학
* 신플라톤주의 : 그 철학은 원래 발생한 원산지가 아닌 변방을 에둘러서 발전하였는데 그 새로운 자궁은 아랍지역의 이슬람학자들 이었다라는...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9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8 항 ]
헤겔철학은 사유와 존재의 모순을 넘어서지 못했다. 현상학이 출발한 존재는 논리학이 출발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존재와 직접 모순된다. 이러한 모순이 현상학에서 '이-' 혹은 '보편적' 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체는 존재에 속하고 보편은 사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이 두개가 구분되지 않고 사유 속에서 합류된다. 그러나 추상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이것'과 현실의 대상이 되는 '이것' 사이에는 얼마만한 큰 차이가 있느나! 이 여자는 예를 들면 나의 여자이고 이 집은 나의 집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처럼 자기 집과 자기 여자에 대해서 이 집, 이 여자라고 말한다. '이-'라는 말의 논리적인 동의성과 비구분성은 그러므로 여기서 법적 의미에 의해 무너지고 지양된다. 논리적인 '이-'를 자연법에서 타당하게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저-'의 구별이 없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재산이나 여자의 공동사회로 곧장 나아가게 될 것이다. - 혹은 모든 법을 바로 폐기하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라는 실재성위에 기초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언어와 개별적인 사물 사이의 모순이다. 단지 언어에만 의존하는 사유는 이러한 모순을 넘어서지 못한다. 언어가 사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 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헤겔에서는 여기서 처럼 실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이론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된다고 항의를 한다면 이 이론적인 관점이 여기서도 해당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는 바로 실천적인 문제이다. 즉 우리의 존재가 참여하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법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수하려고 하면 그것이 논리로 부터 분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논리에 의해서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천적인 관점인 먹고 마시는 관점까지도 현상학에 의해서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의 진리를 반박하기 위한 예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실존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언어적 혹은 논리적인 빵 - 추상적인 빵 -이 아니라 항상 여기 있는 언어가 필요없는 빵이다. 순전히 이러한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위에 기초된 존재는 그러므로 그 자신 어떤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진술된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멈추는 곳에 비로소 삶이 시작되고 존재의 비밀이 문을 연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모든 실존은 비이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은 항상 이러한 말해질 수 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존은 말해질 수 없어도 그 자체로 의미와 이성을 갖는다.
[ 제 28 항 ]
헤겔철학은 사유와 존재의 모순을 넘어서지 못했다. 현상학이 출발한 존재는 논리학이 출발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존재와 직접 모순된다. 이러한 모순이 현상학에서 '이-' 혹은 '보편적' 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체는 존재에 속하고 보편은 사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이 두개가 구분되지 않고 사유 속에서 합류된다. 그러나 추상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이것'과 현실의 대상이 되는 '이것' 사이에는 얼마만한 큰 차이가 있느나! 이 여자는 예를 들면 나의 여자이고 이 집은 나의 집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처럼 자기 집과 자기 여자에 대해서 이 집, 이 여자라고 말한다. '이-'라는 말의 논리적인 동의성과 비구분성은 그러므로 여기서 법적 의미에 의해 무너지고 지양된다. 논리적인 '이-'를 자연법에서 타당하게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저-'의 구별이 없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재산이나 여자의 공동사회로 곧장 나아가게 될 것이다. - 혹은 모든 법을 바로 폐기하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라는 실재성위에 기초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언어와 개별적인 사물 사이의 모순이다. 단지 언어에만 의존하는 사유는 이러한 모순을 넘어서지 못한다. 언어가 사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 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헤겔에서는 여기서 처럼 실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이론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된다고 항의를 한다면 이 이론적인 관점이 여기서도 해당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는 바로 실천적인 문제이다. 즉 우리의 존재가 참여하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법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수하려고 하면 그것이 논리로 부터 분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논리에 의해서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천적인 관점인 먹고 마시는 관점까지도 현상학에 의해서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의 진리를 반박하기 위한 예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실존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언어적 혹은 논리적인 빵 - 추상적인 빵 -이 아니라 항상 여기 있는 언어가 필요없는 빵이다. 순전히 이러한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위에 기초된 존재는 그러므로 그 자신 어떤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진술된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멈추는 곳에 비로소 삶이 시작되고 존재의 비밀이 문을 연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모든 실존은 비이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은 항상 이러한 말해질 수 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존은 말해질 수 없어도 그 자체로 의미와 이성을 갖는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8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6 항 ]
추상적으로만 사유하는 본질은 존재, 실존, 현실에 대해서 어떤 예감도 갖지 못한다. 존재는 사유의 한계이다. 존재로서의 존재는 절대적인 -적어도 추상적인 - 철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변철학은 존재가 동시에 비존재 즉 無라는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무는 그러한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사변적인 사고의 대상이 되는 그런 존재는 완전히 직접적인 것 즉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고 사유될 수 없다. 그러나 추상적인 사유는 자체로 모든 실재성의 척도이고 거기서 스스로 분명해지고 거기서 사유의 소재를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만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사유에게는 존재가 사유될 수 없는 것 즉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의 無 즉 사유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사변철학이 자기 영역 안에 끌어들이고 개념에 되돌려 주는 존재는 현실존재 및 인간이 존재라고 이해하는 어떤 것과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순수한 유령이다.
존재라는 말 속에 인간은 사실과 이성에 부합하는 현존, 대자체(對自體), 실재성, 현실성, 객관성 등을 이해한다. 이 모든 규정 혹은 이름들은 똑같은 사태를 다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할 뿐이다. 추상적인 존재, 객관성이 없는 존재, 현실성이 없는 존재, 대자(對自)가 없는 존재는 물론 무이다. 그러나 이 무 속에서 나는 다만 나의 추상성이 무임을 표현할 뿐이다.
[ 제 27항 ]
헤겔 논리학에서 나타나는 존재는 모든 사물에 관해서 구분없이 진술되는 고대 형이상학의 존재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구분없는 존재는 그러나 하나의 추상적인 생각이고 실재성이 없는 사유다. 존재는 사물의 본질처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볼프학파의 형이상학에 神, 세계, 인간, 책상, 책 등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일치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토마시우스는 말한다. "존재는 어디서나 동일하다. 본질은 사물처럼 다양하다" 어디서나 동일하고 구분과 내용이 없는 이러한 존재는 헤겔논리학의 존재이기도 하다. 존재와 무의 일치에 대한 항의는 존재에 대한 일정한 내용을 설정하기 때문에 연유한다고 헤겔 자신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존재의식은 항상 필연적으로 일정한 내용과 결부된다. 존재의 내용에서 즉 모든 내용에서(왜냐하면 모든 것은 존재의 내용이므로) 추상화되면 남는 것은 물론 무에 대한 생각뿐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존재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을 논리학의 대상과 같은 존재에 부속시키려는 보편적인 의식을 비난할 때 오히려 그가 밑바닥 없는 추상을 인간의 의식이 합법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존재안에서 이해하는 어떤 것에 부속시킨다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존재는 결코 사물에서 분리된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있는 것과 일치한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만 즉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술어를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 존재는 본질의 위치다.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이 나의 존재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지만 이러한 존재로 부터 그대는 그 본질을 분리할 수 없다. 언어가 이미 존재와 본질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생활에서만 그리고 특히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경우에만 존재는 본질에서 분리된다. 존재와 본질을 갖고 있지만 이 둘을 구분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거나 실제로 육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참으로 영혼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례가 나타난다. 그대의 마음이 있는 곳에만 그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본질은 - 반자연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 그것이 있는 곳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 즉 그의 본질은 존재에서 그리고 존재는 본질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존재를 본질의 다양성과 구분해서 그 자체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고정해서는 안된다. 사물의 모든 근본적인 성질을 제거한 존재는 존재에 대한 그대의 상상 - 조작되고 상상된, 존재의 본질이 없는 존재 - 일 뿐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7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4 항 ]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동일철학의 핵심은 개념이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神개념으로부터의 필연적인 귀결에 불과하다.
사변철학은 신학이 신(神) 개념의 배타적 특성으로 만든 것을 보편화하고 사유와 개념일반의 특성으로 만든데 불과하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그러므로 이성의 신성을 표현한데 불과하며 사유 혹은 이성이 절대적인 본질이고 모든 진리와 실재성의 총체이며 이성의 반대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이 모든 것이라는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엄밀한 신학에서 신이 모든것 즉 모든 본질적이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그러나 사유와 분리되지 않는 존재 즉 이성의 술어나 규정으로서의 존재는 단지 사유된 추상적 존재이고 실재로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그러므로 사유가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절대적 사유는 스스로에게 이탈되지 않고 스스로에서 존재로 나아가지 않는다.
존재가 내세로 머문다. 절대적인 철학은 확실히 신학의 내세를 현세로 만들었지만 그 대신 현실 세계의 현세를 내세로 만들었다.
사변적 혹은 절대적 철학의 사유는 존재를 중재의 활동인 스스로와 구분해서 직접적인 것, 중재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유에 대해서 - 적어도 여기 우리가 갖고 있는 사유 - 존재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는 존재를 내세우지만 그 자신안에서 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직접 어려움 없이 스스로에 대한 반대를 지양해 버린다. 왜냐하면 사유속에서 사유의 반대자로서 나타나는 존재는 사유 자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직접적인 것에 불과하고 이 직접성만이 사유와의 구분을 만든다면 사유에도 직접성의 규정 즉 존재가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아주 용이하지 않은가! 단순한 사유의 규정이 존재의 본질을 만든다면 존재가 어떻게 사유와 구분될 수 있는가?
[ 제 25 항 ]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어떤것이 사유된 것 이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증명은 그러나 사유 자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는 없다. 사유의 대상에 존재가 첨부되어야 된다면 사유 자체에 사유와 구분된 어떤 것이 첨부되어야 한다.
존재론적 증명의 비판에서 사유와 존재의 구별을 나타내기 위해 칸트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러나 헤겔에 의해서 비웃음을 받았던 상상 속의 100탈러와 실제 100탈러 사이의 구분에 관한 예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옳다. 왜냐하면 한쪽 탈러는 머리속에만 있고 다른 것은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나에게만 존재하고 뒤의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 그것은 느껴지고 보여진다 ; 여하튼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동시에 존재하고 그에 관해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고 나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 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사유 자체속에서 나는 나와 일치하고 절대적인 주인이 된다. 여기서는 나에게 모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는 내가 동시에 재판자이고 당사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대상과 이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 사이에는 어떤 비판적인 구분도 없다. 그러나 순전히 한 대상의 존재가 문제될 때 나는 자기로부터 충고를 구할 수 없고 나와 구분되는 증인으로부터 청문해야 한다. 이렇게 사유하는 사람으로서의 나와 구분되는 증인이 감각이다. 존재란 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 특히 대상 자체가 연관되는 어떤 것이다. 존재는 주관이 되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가 주관이냐 객관이냐, 나 자신을 위한 존재냐 다른 존재를 위한 존재냐 즉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느냐는 참으로 똑 같은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상상의 단순한 대상이고 따라서 죽은 뒤의 사람처럼 내 자신이 아닐때 다른 사람은 나에 관해서 참으로 하나의 풍자화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나는 그에 대해 항의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실재로 존재할 때 나는 계산서에 줄을 긋고 상상의 나와 현실적인 나, 그의 대상이 되는 나와 주관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깨닫게 하고 증명할 수 있다. 사유속에서 나는 절대적인 주관이고 모든 것을 사유하고 있는 나의 대상이나 술어로만 타당성을 갖게 한다. 나는 여기서 관용이 없다. 이에 반해 감각활동 속에서 나는 여유가 있고 대상으로 하여금 나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본질로서 주관이 되게 한다. 감각과 직관만이 나에게 어떤 것을 주관으로 부여해 준다.
Tuesday, April 27,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6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3 항 ]
스피노자 철학이 신학적 유물론인 것처럼 헤겔 철학은 전도된 관념론 즉 신학적인 관념론이다. 그것은 자아의 본질을 자아 밖에서 설정하고 자아에서 분리해서 실체 혹은 신으로 대상화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있어서 물질처럼 그것을 신적인 실체의 속성 혹은 형식으로 만듬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간접적으로 어긋나게) 자아의 신성을 말한 것이 되었다. 즉 신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신의 자의식이다. 이말은 본질은 신에 속하나 지식은 인간에 속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신의 본질은 헤겔에서 실제로 사유의 본질 혹은 사유자인 자아에서 추상화된 사유에 불과하다. 헤겔철학은 사유 즉 주관적 본질을 신적인 절대적 본질로 만들었는데 이 주관적 본질이 여기서 주관이 없고 주관과 다른 어떤 본질로 상상된다.
'절대적인' 철학의 비밀은 그러므로 신학의 비밀이다. 신학이 인간의 제규정을 인간이 그 안에서 존재하고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규정을 박탈함으로써 신적인 규정으로 만드는 것처럼 절대적인 철학도 꼭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성의 사유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즉 내가 요구하는 입장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은 사유자로 부터 추상화되어야 한다. 이 추상화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이성이 일반적으로 상상되듯 어떤 주관적인 것이 되는 일이 중단된다. 물론 이성 자체는 더 이상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것 혹은 사유된 것은 사유하는 사람과 상반해서 혹은 완전히 추상화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이러한 추상화를 통해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일치점에 도달하는 참된 자아로 나아간다" (쉘링)
헤겔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헤겔 논리학의 본질은 주관성의 사유나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 규정성을 상실한 사유이다. 논리학의 제 3절은 분명히 주관적인 논리학이라고 까지 불리워지며 그 대상이 되는 주관성의 형식들이 동시에 주관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개념, 판단, 추리 그리고 문제성이 많은 긍정판단의 경우에서 처럼 개별적인 추리 및 판단형식들 까지도 우리로부터 나온 개념, 판단, 추리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객관적이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형식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철학은 인간에게 그 본질과 활동을 외화시키고 소외시킨다! 우리의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과 고문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되고 어떤 것의 본질이 들어 잇는 규정으로 부터 추상화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의미없이 사유해야 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의 무의미 속에서 받아들여야 된다. 무의미가 일반적인 혹은 사변적인 신학의 최고 본질이다.
헤겔이 피히테의 철학에 관해 비난한 것 즉 각자가 자아를 자체속에 갖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그것을 기억하나 자아는 자체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모든 사변철학에 해당된다. 사변철학은 모든 사물을 이 사물이 더이상 인식되지 않는 의미로 파악한다. 이러한 잘못의 근거는 바로 신학이다. 신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은 유한한 현실적인 본질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규정이란 그것이 자연적이든 인간적이든 현실적인 사물의 규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들이 어떻게 절대적인 규정이 될 수있단 말인가? 다만 그들이 현실적인 의미와 다른 의미에서 즉 완전히 전도된 의미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가능할 뿐이다.
유한한 것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절대적인 것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여기와 완전히 다르다. 거기서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들이 타당하게 된다. 우리에게서 순전히 무의미한 것이 거기서는 이성이고 지혜다. 한 사물의 이름을 이 이름과 결부된 개념의 타당성을 묻지도 않고 사용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사변의 무한한 자의성(恣意性)이 발생한다. '공통의식'이 상상들을 (이 개념의 유사성과 아주 먼 것일지라도) 이 개념에 대해 연결시킬 수 있는 명칭들을 언어로부터 선택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변은 그들의 자의를 변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를 언어에 뒤집어 씌운다. 그러나 그 죄는 사변의 원리 자체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내용과 이름사이의, 상상과 개념사이의 사변이 갖는 이러한 모순은 바로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인 본질에 대한 규정 사이의 오래된 신학적인 모순에 불과하다. 이런 규정은 인간에 관해서는 본래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로, 신에 관해서는 그러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여하튼 철학은 통속적인 사용이나 오용이 하나의 이름과 결부시키는 상상들에 관여할 것이 아니고 일정한 자연의 사물에 결부되어야 된다. 이름이란 이들의 부호일 뿐이다.
* "본질은 신에 속하나 지식은 인간에 속한다" ; 인간에게 구속된 신의 운명 - 스스로 그러하고 스스로 존재하나 인간에게 속박될 수 밖에 없는 신의 가학적인 자기 형벌이다.
* 포이에르바흐의 언명처럼 어찌 보면 "존재는 사유의 한계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5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2 항 ]
신의 본질이 자연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본질에 불과한 것처럼 절대적 관념론의 본질은 주관의 이성적 제한 즉 감성이나 대상성 일반에서 벗어난 주관적 관념론의 본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헤겔철학은 칸트나 피히테의 관념론에서 직접 연역될 수 있다.
칸트는 말한다 ; "우리가 감각의 대상을 단순히 현상으로 간주할 때 이 현상들의 기초에는 물자체가 놓여 있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는 것이며 이 물자체는 그 본질이 아니라 단지 현상만 즉 미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우리의 감각이 촉발되는 방식만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 현상들을 가정한다는 사실만으로 오성은 물자체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이러한 본질에 대한 상상이 단순히 오성의 본질에 통용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감각이나 경험의 대상들은 그러므로 오성에 대해서는 단순한 현상이며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성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즉 오성의 본질에 합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성은 감성 때문에 그 본질상 제한을 받는 일이 결코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오성은 감성적인 대상을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진리로 간주했을 것이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나를 구속하거나 제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성 본질이 오성에 대해서 참된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니!
칸트철학은 주관과 객관, 본질과 실존, 사유와 존재 사이의 모순이다. 여기서는 본질이 오성으로 실존이 감각으로 낙착된다. 본질이 없는 실존은 단순한 현상이다 - 그것은 감각적 대상이다 - 실존없는 본질은 단순한 사유다 - 그것은 오성본질 즉 사유체다 ; 그들은 사유되나 실존이 없다 - 적어도 우리에 대해서는 실존 즉 객관성이 없다 ; 그들은 물자체이고 참다운 존재이다. 단지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오성에 대해서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즉 오성에 의해서 규정되거나 인실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현실과, 현실을 진리와 분리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모순을 지양할고 할 때 동일철학이 나타나고 여기서는 오성대상 즉 사유된 물체가 참되고 현실적이며, 또 오성 대상의 본질과 특성이 오성 혹은 주관의 본질과 특성에 합치되며 그러므로 주관은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고 그 본질에 모순되는 질료에 의해 더이상 제한되거나 조건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외의 어떤 사물도 갖지 않고 그러므로 어떤 제한을 받지 않는 주관은 더 이상 '유한한' 주관이 아니다. 객관에 대면해 있는 자아가 아니고 절대적 본질이며 이것의 신학적 일반적 표현은 '신은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주관적 관념론에서와 똑같은 주관, 똑같은 자아이나 제한이 없는 즉 더 이상 자아가 아닌 자아, 주관적 본질처럼 보이는 자아 그러므로 더 이상 자아라고 불리어질 수 없는 자아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4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9 항 ]
근세철학의 완성이 헤겔철학이다. 새로운 철학의 역사적인 필연성과 정당성은 그러므로 주로 헤겔 비판과 결부된다.
[ 제 20 항 ]
새로운 철학은 그 역사적인 출발점에 비추어 지금까지의 철학이 신학에 대해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과제와 입장을 갖는다. 새로운 철학은 헤겔철학과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현은 동시에 부정이며 더욱 아무런 모순이 없게 부정하는 것이다.
[ 제 21 항 ]
근세철학 특히 범신론의 모순 즉 신학의 입장에 선 신학의 부정이라든가 신학을 부정하지만 스스로 다시 신학이 되어버리는 모순이 무엇보다도 헤겔철학을 특징지우고 있다.
근세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철학에서도 비물질적인 본질 즉 순수한 오성대상이나 오성보질과 같은 본질이 참다운 절대적인 본질 즉 신이다. 스피노자가 신적인 실체의 속성으로 생각한 물질까지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물질이고 순수한 오성본질이다. 왜냐하면 오성이나 사유활동과 구분되는 물질의 주요한 규정 즉 수동적인 본질이 되는 규정이 물질로부터 박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본질에 대한 물질적이고 감성적인 본질의 관계를 다르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헤겔은 그 이전의 철학과 구분된다. 헤겔 이전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참되고 신적인 본질을 자연이나 감성 혹은 물질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된 본질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 감각적인 것에서 해방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들은 감성에서 해방하고 추상화하는 작업이나 노력을 자기 자신속으로만 옮겨놓았다. 그들은 이러한 자유존재 속에 신적 본질이라는 행복을 설정하고 이러한 해방속에서 인간적인 본질의 덕을 설정했다.
이에 반해 헤겔은 주관적인 활동성을 신적 본질의 자기 활동성으로 바꾸었다. 신 자신이 이런 노력을 해야 히고 이교도의 영웅처럼 덕을 통해서 스스로의 신성을 획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만 물질로부터 절대자의 해방이 활동과 진리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전제나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로 부터 자기 해방은 신 속에 물질이 동시에 설정된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이 어떻게 신속으로 설정될 수 있는가? 다만 신 자신이 물질을 설정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신 속에는 신만 있다. 그러므로 결국 신 자신이 스스로를 물질로, 신 아닌 것으로, 타라로 설정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물질은 그러므로 자아나 정신에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전제되어 있는 자아나 정신의 반대물이 아니다 ; 물질은 정신의 자기외화(自己外化)이다. 이렇게 해서 물질 자체가 정신과 오성의 성격을 얻게 되고 절대적 본질의 생명요소, 형성요소, 발전요소로서 절대적 본질 속에 수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外化 현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즉 물질이나 감성을 제거하는 본질이 비로소 완성되고 참다운 모습과 형태의 본질이라 주장되기 때문에 물질은 다시 참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본질이 되어버린다. 자연적이고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것 - 물론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감각적인 것 - 은 그러므로 신학에서 오염된 자연처럼 여기서도 부정되어야 될 어떤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들은 이성이나 자아, 정신 속에 수용되지만 이성 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것이고 자아속에 있는 비아(非我) 즉 자아의 부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쉘링에서 신 속에 있는 자연이 신 속에 있는 비신적인 것이고 신 속에 있지만 신 밖에 있는 것과 같으며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육체가 나의 정신고 결합되지만 나의 밖에 존재하고 나의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육체가 나와 결합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과 같다. 물질이 철학에 의해서 참다운 본질로 전제되는 본질과 모순 상태에 있다.
물질은 신 속으로 즉 신으로 설정되며 물질이 신으로 설정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신학을 지양하고 유물론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신학의 본질이라는 진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부정인 무신론이 다시 부정되고 철학을 통해서 신학이 다시 소생한다. 신이 신이 되는 것은 신의 부정인 물질을 극복하고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헤겔에 의하면 부정의 부정만이 참된 긍정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가 출발한 곳 즉 기독교 신학의 품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철학의 최고 원리 속에서 우리는 벌써 철학은 신학의 독단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의 합리론의 부정으로부터 부활시키고 재생하는 것에 불과한 헤겔 종교철학의 원리와 결과를 보게 된다. 헤겔 변증법의 비밀은 결국 그가 신학을 철학으로 부정했지만 다시 철학을 신학으로 부정하는데 있을 뿐이다.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은 신학이고 중간에 긍정의 부정으로서 철학이 서 있으나 이 부정의 부정은 신학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와 비슷하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전복되나 다시 옛 장소로 놓아진다.
헤겔철학은 몰락하고 소멸된 기독교를 철학으로 재건하려는 마지막 위대한 시도이며 여기서도 물론 근세일반에서 처럼 기독교의 부정이 기독교 자체와 일치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정신과 물질, 무한자와 유한자,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사변적인 일치는 많이 칭찬되지만 결국 신앙과 무신앙, 신학과 철학, 종교와 무신론, 기독교와 이교도들을 형이상학의 정상이라는 최고의 정상에서 일치시키려는 근세의 불행한 모순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모순들이 헤겔의 통찰을 벗어나서 흐릿해지며 신의 부정인 무신론이 신의 객관적인 규정이 된다. 즉 신이 하나의 발전과정으로 그리고 무신론이 이 발전과정의 한 요소로 규정된다. 그러나 무신앙으로 부터 부활된 신앙이 항상 그 반대와 결부된 신앙이기 때문에 결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는 것 처럼 부정으로 부터 부활된 신도 결코 참다운 신이 아니며 오히려 스스로 모순되는 무신론적인 신에 불과하다.
* 혁명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 "처음에는 모든 것이 전복되나 다시 옛 장소로 놓아진다" - 비판은 전복이 아니라 그 궁극적 귀결은 "호교론"으로, 또는 '긍정적' 재 배치이다 - 나의 판으로 다시 짜는 것.
* 체제의 힘 ; "신의 부정인 무신론이 신의 객관적인 규정이 된다. 즉 신이 하나의 발전과정으로 그리고 무신론이 이 발전과정의 한 요소로 규정된다" - 그것 처럼, 다양한 반-자본주의, 반-문화운동 들...은 결국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움직이며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3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8 항 ]
근세철학은 감성, 세계, 인간으로 부터 유리되고 구분된 신적 본질을 실현하고 지양했지만 사유와 이성에서일 뿐이고 물론 이 경우의 이성도 감성, 세계, 인간으로부터 유리되고 분리된 이성이다. 이 말은 근세철학이 오성의 신성만을 증명했고 추상적인 오성을 신적, 절대적 본질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정신으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말 - '나의 본질은 사유하는데 있을 뿐이다 - 은 스스로에 대한 근세철학의 정의이다.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에 나타나는 의지 자체가 하나의 순순한 오성본질이고 피히테에 반해서 쉘링이 오성과 결합한 직관은 환상에 불과하고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근세철학은 신학에서 출발했으며 철학으로 용해되고 응용된 신학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신의 본질이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만 실현되고 지양될 수 있었다. 신을 이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성 자체가 추상적이고 신적인 본질의 특성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감각기관은 참된 실재성이나 본질이나 확신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감각으로부터 분리된 오성만이 진리를 부여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오성과 감각 사이의 이러한 균열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다만 신학에서 나올 뿐이다. 신은 결코 감성적인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감성의 제규정에 대한 부정이고 감성으로부터 추상될 때만 인식된다. 그러나 신은 신 즉 가장 참되고 가장 실재적이며 가장 확실한 본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진리가 선천적으로 무신론자인 감각 속에 나타나는 것일까? 신이란 본질에서는 실존이 본질이나 개념과 구분되지 않으며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만 상상될 수 있는 본질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객관적인 본질을 주관적인 본질로, 존재론적인 증명을 심리학적인 증명으로, '신이 사유하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꾼다. 신에서 존재가 사유되는 것으로부터 구분되지 않는 것 처럼, 정신이 본질을 이루는 나에게 있어서도 존재는 사유와 구분되지 않는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본질이 되는 것은 이렇게 존재와 사유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나를 위해서 존재하거나에 관계 없이 사유체로서 즉 모든 감성으로부터 추상되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본질은 사유하는 본질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실현되고 주관화 되며 이러한 본질의 핵심은 추상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 존재와 사유의 분리 불가능성; 데카르트의 언명, 'Cogito. ergo sum' 라는 황량한 소리 보다는, "나의 존재는 신의 사유이다" 라는 위안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 제 18 항 ]
근세철학은 감성, 세계, 인간으로 부터 유리되고 구분된 신적 본질을 실현하고 지양했지만 사유와 이성에서일 뿐이고 물론 이 경우의 이성도 감성, 세계, 인간으로부터 유리되고 분리된 이성이다. 이 말은 근세철학이 오성의 신성만을 증명했고 추상적인 오성을 신적, 절대적 본질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정신으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말 - '나의 본질은 사유하는데 있을 뿐이다 - 은 스스로에 대한 근세철학의 정의이다.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에 나타나는 의지 자체가 하나의 순순한 오성본질이고 피히테에 반해서 쉘링이 오성과 결합한 직관은 환상에 불과하고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근세철학은 신학에서 출발했으며 철학으로 용해되고 응용된 신학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신의 본질이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만 실현되고 지양될 수 있었다. 신을 이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성 자체가 추상적이고 신적인 본질의 특성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감각기관은 참된 실재성이나 본질이나 확신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감각으로부터 분리된 오성만이 진리를 부여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오성과 감각 사이의 이러한 균열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다만 신학에서 나올 뿐이다. 신은 결코 감성적인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감성의 제규정에 대한 부정이고 감성으로부터 추상될 때만 인식된다. 그러나 신은 신 즉 가장 참되고 가장 실재적이며 가장 확실한 본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진리가 선천적으로 무신론자인 감각 속에 나타나는 것일까? 신이란 본질에서는 실존이 본질이나 개념과 구분되지 않으며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만 상상될 수 있는 본질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객관적인 본질을 주관적인 본질로, 존재론적인 증명을 심리학적인 증명으로, '신이 사유하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꾼다. 신에서 존재가 사유되는 것으로부터 구분되지 않는 것 처럼, 정신이 본질을 이루는 나에게 있어서도 존재는 사유와 구분되지 않는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본질이 되는 것은 이렇게 존재와 사유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나를 위해서 존재하거나에 관계 없이 사유체로서 즉 모든 감성으로부터 추상되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본질은 사유하는 본질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실현되고 주관화 되며 이러한 본질의 핵심은 추상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 존재와 사유의 분리 불가능성; 데카르트의 언명, 'Cogito. ergo sum' 라는 황량한 소리 보다는, "나의 존재는 신의 사유이다" 라는 위안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7 항 ]
물질을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이성을 바로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유신론자가 기분의 욕구에서 즉 상상력의 도움으로 무한한 행복을 요구하면서 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을 범신론자는 이성의 요구 때문에 신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긍정한다. 물질은 이성의 주요한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이 없다면 이성은 사유하고 싶은 충동이나 재료 즉 사유의 내용을 갖지 못한다.
물질을 포기하면 동시에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물질을 인정하면 동시에 이성도 인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합리론자들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신적인 본질로서의 이성을 간접적으로만 인정한다. 즉 범신론은 신을 유물론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때 해당하는 상상력의 본질로 부터 하나의 이성대상으로 혹은 이성의 본질로 만든다. 이성를 직접적으로 神化시키는 것은 관념론이다. 범신론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범신론이 유신론에 관계하는 것고 똑같이 관념론은 범신론에 관계한다.
주관과 객관은 늘 연관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적인 실체는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데카르트에 의하면 감각이 아니라 오성이 지각의 주체인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본질이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본질에 대해서 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의견은 가변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견 자체도 영속적이 아니고 가변적인 지식 즉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음악가에게는 음악의 본질이 최고 본질이며 청각이 최고의 감각기관이다. 음악가는 귀보다도 오히려 눈을 잃고 싶어한다. 이에 반해 자연과학자는 객관적인 본질이 빛이므로 눈보다는 오히려 귀를 잃고 싶어한다. 인간이 음을 신격화 시키면서 귀도 따라서 신격화 된다 .
우리가 범신론자처럼 신, 혹은 같은 의미의 절대적인 본질, 절대적인 진리와 실재성이 이성에 대해서만 대상이 된다고 말하면 결국 우리는 신을 하나의 이성체 혹은 이성본질로 규명하는 것이 되며 이성의 절대적 진리와 실재성을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성이 스스로에 복귀되고, 전도된 자기인식을 뒤바꾸고, 스스로를 절대적인 진리로 직접 표현하며, 어떤 대상의 중개물도 필요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스스로의 대상이 된다. 범신론자와 관념론자가 말하는 것은 동일하나 후자가 주관적으로 즉 관념론적으로 말하는 것을 전자는 객관적으로 즉 실재적으로 말할 뿐이다.
범신론이 대상속의 관념론이라면 관념론은 자아속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범신론에서는 실체인 신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신의 규정에 불과하며, 관념론에서는 자아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자아의 규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념론은 곧 범신론의 진리다. 왜냐하면 신 혹은 실체는 이성 혹은 사유하는 본질인 자아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을 전혀 믿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신은 없는 것과 같으며 신은 나를 통해 나에게만 즉 이성을 통해 이성에만 존재한다. 선험적인 최초의 본질은 그러므로 사유된 본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본질이고 대상이 아니라 주관이다.
자연과학이 필연적으로 빛에서 눈으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철학은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사유하는 자아로 되돌아 간다. 눈이 없다면 밝은 빛을 주는 본질이며 광학의 대상인 빛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無와 같다. 자연과학은 여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더 나아가서 묻는다. 의식이 없다면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역시 무이다. 의식없이 보는 것은 못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다는 의식이 비로소 보는 것의 현실성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외부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가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가 어떤 것은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로 이 어떤 것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며 실제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절대적인 실재성이고 현실성이며 모든 실존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즉 의식된 것에 불과하다. 의식이 비로소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론에서는 이렇게 신학의 본질이 실현되고, 자아와 의식속에서 신의 본질이 실현된다. 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다. 이 말을 관념론의 의미로 풀어 쓰면 모든 것은 그것이 현실태이든 가능태이든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전제로 한다. 사물이나 세계 일반은 절대적인 본질인 신의 작품이고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본질은 자아 즉 의식하고 사유하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데카르트가 유신론의 입장에서 탁월하게 진술한 것 처럼 하나의 사고물(思考物)이며 신의 환영(幻影)에 불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물이 유신론이나 신학에서 다시 하나의 애매한 상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상을 실현하면 즉 신학에서 이론에 불과한 것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면 남는 것은 자아의 산물로서 세계이며(피히테) 혹은 - 적어도 우리에게 나타나고 우리가 직관하는 것과 같은 - 직관과 오성은 작품이나 산물로서의 세계이다(칸트)
"자연은 경험일반의 가능한 법칙에 의해 연역된다". "오성은 그의 법칙을 (선험적으로) 자연에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 법칙을 설정한다" 오성이 사물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물이 오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칸트의 관념론은 그러므로 사물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규정하는 신적 오성의 신학적 상상을 실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상의 관념론 즉 상상의 관념론을 신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반면, 지상의 관념론 즉 이성의 관념론을 인간적인 오류로 배격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신만이 관념론의 창시자이다. 여러분들이 이것의 결과(관념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神)도 거부하라! 관념론은 합리적인 혹은 합리화된 신학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관념론은 아직 제한된 관념론이며 경험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경험론에게 신은 상상이나 이론(일반적이고 보통의 의미에서)속에서의 신에 불과하며 활동이나 진리 속의 본질이 아니다. 신은 물(物) 자체 (Ding an sich - Thing it self)이나 그들에게 아무런 物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物이 되는 것은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물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경험론의 사유를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재료이고 그러므로 경험론은 신에 대한 재료를 더이상 알지 못한다. 신이 존재하지만 그들에게는 백지 즉 공허한 본질이나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신은 우리의 자아이고 오성이고 본질이지만 이러한 신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현상에 불과하지 신 자체가 아니다. 칸트철학은 아직도 유신론에 얽매여 있는 관념론이다.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본질 속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경우에도(아마 결코 진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이론적으로 진리가 되어 우리 두뇌의 제한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 적어도 많은 사물 속에서 이론적인 자유가 마지막 자유가 된다. 얼마나 많은 공화주의자가 마음이나 생각 속에서는 군주주의를 극복했지만 머리속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가, 그들의 공화주의적 정열은 오성에서 연유하는 반박이나 난제 앞에 실패한다. 칸트의 유신론도 이와 마찬가지다. 칸트는 신학을 도덕에서 실현함으로써 부정했다. 칸트에 의하면 의지는 자체에서 출발하는 참되고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실제로 신의 술어를 의지엑 되돌려 주었다. 그의 유신론은 이때문에 아직 이론적으로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유신론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칸트가 피히테이고 그는 "사변이성의 구세주"이다. 피히테도 칸트적인 관념론이지만 그러나 관념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경험론의 입장에서만 인간과 구분되고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관념론의 입장에서는 물자체와 신이 (왜냐하면 신은 원래 물자체이므로) 자아 자체 즉 개인이나 경험적인 자아와 구분되는 자아에 불과하다. 자아의 밖에는 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종교는 이성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관념론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유신론 혹은 일신론을 부정하고 실현한 것에 불과하며 종교적이고 물질적이고 내용이 충만된 유신론 즉 삼위일체의 부정이나 실현은 아니다.
헤겔의 절대적인 관념론이 비로소 후자를 실현하게 된다. 다른말로 말하면 피히테가 범신론의 신을 실현한 것은 이 신이 사유하는 본질일 때에 한하며 연장(延長)이 있고 물질적인 본질일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 피히테는 유신론적인 관념론이며 헤겔은 범신론적인 관념론이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신론-범신론-관념론의 자기참조적인 무한순환 구조"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게 아니라 자기수렴을 통한 무성생식적 확장일 뿐이다.
* 척도가 "신"으로부터 "이성" 혹은 "의식"으로 나아간다라고 해도... 결국은 현세 권력의 정치에서처럼 정파만 바뀔 뿐이지 그 구조나 판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원론 ; 삶은 신의 환영, 또는 "삶은 악령의 기만" - 양동이 속의 뇌..
*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Wir sind oft laengst von einer Sache, einer Lehre, einer Idee der Tat nach frei, aber gleichwohl sind wir es noch nicht im Kopfe... Der Kopfe, weil er die Dinge am gruendlichsten nimmt, wird auch am spaetesten frei")
* 계몽주의 ; 체제/시스템/이데올로기로 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종교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해방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범우주적 신적 차원에서의 "억압"적 체계를 전제로 한다
[ 제 17 항 ]
물질을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이성을 바로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유신론자가 기분의 욕구에서 즉 상상력의 도움으로 무한한 행복을 요구하면서 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을 범신론자는 이성의 요구 때문에 신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긍정한다. 물질은 이성의 주요한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이 없다면 이성은 사유하고 싶은 충동이나 재료 즉 사유의 내용을 갖지 못한다.
물질을 포기하면 동시에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물질을 인정하면 동시에 이성도 인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합리론자들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신적인 본질로서의 이성을 간접적으로만 인정한다. 즉 범신론은 신을 유물론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때 해당하는 상상력의 본질로 부터 하나의 이성대상으로 혹은 이성의 본질로 만든다. 이성를 직접적으로 神化시키는 것은 관념론이다. 범신론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범신론이 유신론에 관계하는 것고 똑같이 관념론은 범신론에 관계한다.
주관과 객관은 늘 연관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적인 실체는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데카르트에 의하면 감각이 아니라 오성이 지각의 주체인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본질이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본질에 대해서 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의견은 가변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견 자체도 영속적이 아니고 가변적인 지식 즉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음악가에게는 음악의 본질이 최고 본질이며 청각이 최고의 감각기관이다. 음악가는 귀보다도 오히려 눈을 잃고 싶어한다. 이에 반해 자연과학자는 객관적인 본질이 빛이므로 눈보다는 오히려 귀를 잃고 싶어한다. 인간이 음을 신격화 시키면서 귀도 따라서 신격화 된다 .
우리가 범신론자처럼 신, 혹은 같은 의미의 절대적인 본질, 절대적인 진리와 실재성이 이성에 대해서만 대상이 된다고 말하면 결국 우리는 신을 하나의 이성체 혹은 이성본질로 규명하는 것이 되며 이성의 절대적 진리와 실재성을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성이 스스로에 복귀되고, 전도된 자기인식을 뒤바꾸고, 스스로를 절대적인 진리로 직접 표현하며, 어떤 대상의 중개물도 필요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스스로의 대상이 된다. 범신론자와 관념론자가 말하는 것은 동일하나 후자가 주관적으로 즉 관념론적으로 말하는 것을 전자는 객관적으로 즉 실재적으로 말할 뿐이다.
범신론이 대상속의 관념론이라면 관념론은 자아속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범신론에서는 실체인 신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신의 규정에 불과하며, 관념론에서는 자아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자아의 규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념론은 곧 범신론의 진리다. 왜냐하면 신 혹은 실체는 이성 혹은 사유하는 본질인 자아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을 전혀 믿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신은 없는 것과 같으며 신은 나를 통해 나에게만 즉 이성을 통해 이성에만 존재한다. 선험적인 최초의 본질은 그러므로 사유된 본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본질이고 대상이 아니라 주관이다.
자연과학이 필연적으로 빛에서 눈으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철학은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사유하는 자아로 되돌아 간다. 눈이 없다면 밝은 빛을 주는 본질이며 광학의 대상인 빛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無와 같다. 자연과학은 여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더 나아가서 묻는다. 의식이 없다면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역시 무이다. 의식없이 보는 것은 못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다는 의식이 비로소 보는 것의 현실성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외부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가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가 어떤 것은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로 이 어떤 것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며 실제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절대적인 실재성이고 현실성이며 모든 실존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즉 의식된 것에 불과하다. 의식이 비로소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론에서는 이렇게 신학의 본질이 실현되고, 자아와 의식속에서 신의 본질이 실현된다. 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다. 이 말을 관념론의 의미로 풀어 쓰면 모든 것은 그것이 현실태이든 가능태이든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전제로 한다. 사물이나 세계 일반은 절대적인 본질인 신의 작품이고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본질은 자아 즉 의식하고 사유하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데카르트가 유신론의 입장에서 탁월하게 진술한 것 처럼 하나의 사고물(思考物)이며 신의 환영(幻影)에 불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물이 유신론이나 신학에서 다시 하나의 애매한 상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상을 실현하면 즉 신학에서 이론에 불과한 것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면 남는 것은 자아의 산물로서 세계이며(피히테) 혹은 - 적어도 우리에게 나타나고 우리가 직관하는 것과 같은 - 직관과 오성은 작품이나 산물로서의 세계이다(칸트)
"자연은 경험일반의 가능한 법칙에 의해 연역된다". "오성은 그의 법칙을 (선험적으로) 자연에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 법칙을 설정한다" 오성이 사물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물이 오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칸트의 관념론은 그러므로 사물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규정하는 신적 오성의 신학적 상상을 실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상의 관념론 즉 상상의 관념론을 신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반면, 지상의 관념론 즉 이성의 관념론을 인간적인 오류로 배격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신만이 관념론의 창시자이다. 여러분들이 이것의 결과(관념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神)도 거부하라! 관념론은 합리적인 혹은 합리화된 신학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관념론은 아직 제한된 관념론이며 경험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경험론에게 신은 상상이나 이론(일반적이고 보통의 의미에서)속에서의 신에 불과하며 활동이나 진리 속의 본질이 아니다. 신은 물(物) 자체 (Ding an sich - Thing it self)이나 그들에게 아무런 物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物이 되는 것은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물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경험론의 사유를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재료이고 그러므로 경험론은 신에 대한 재료를 더이상 알지 못한다. 신이 존재하지만 그들에게는 백지 즉 공허한 본질이나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신은 우리의 자아이고 오성이고 본질이지만 이러한 신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현상에 불과하지 신 자체가 아니다. 칸트철학은 아직도 유신론에 얽매여 있는 관념론이다.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본질 속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경우에도(아마 결코 진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이론적으로 진리가 되어 우리 두뇌의 제한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 적어도 많은 사물 속에서 이론적인 자유가 마지막 자유가 된다. 얼마나 많은 공화주의자가 마음이나 생각 속에서는 군주주의를 극복했지만 머리속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가, 그들의 공화주의적 정열은 오성에서 연유하는 반박이나 난제 앞에 실패한다. 칸트의 유신론도 이와 마찬가지다. 칸트는 신학을 도덕에서 실현함으로써 부정했다. 칸트에 의하면 의지는 자체에서 출발하는 참되고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실제로 신의 술어를 의지엑 되돌려 주었다. 그의 유신론은 이때문에 아직 이론적으로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유신론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칸트가 피히테이고 그는 "사변이성의 구세주"이다. 피히테도 칸트적인 관념론이지만 그러나 관념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경험론의 입장에서만 인간과 구분되고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관념론의 입장에서는 물자체와 신이 (왜냐하면 신은 원래 물자체이므로) 자아 자체 즉 개인이나 경험적인 자아와 구분되는 자아에 불과하다. 자아의 밖에는 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종교는 이성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관념론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유신론 혹은 일신론을 부정하고 실현한 것에 불과하며 종교적이고 물질적이고 내용이 충만된 유신론 즉 삼위일체의 부정이나 실현은 아니다.
헤겔의 절대적인 관념론이 비로소 후자를 실현하게 된다. 다른말로 말하면 피히테가 범신론의 신을 실현한 것은 이 신이 사유하는 본질일 때에 한하며 연장(延長)이 있고 물질적인 본질일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 피히테는 유신론적인 관념론이며 헤겔은 범신론적인 관념론이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신론-범신론-관념론의 자기참조적인 무한순환 구조"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게 아니라 자기수렴을 통한 무성생식적 확장일 뿐이다.
* 척도가 "신"으로부터 "이성" 혹은 "의식"으로 나아간다라고 해도... 결국은 현세 권력의 정치에서처럼 정파만 바뀔 뿐이지 그 구조나 판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원론 ; 삶은 신의 환영, 또는 "삶은 악령의 기만" - 양동이 속의 뇌..
*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Wir sind oft laengst von einer Sache, einer Lehre, einer Idee der Tat nach frei, aber gleichwohl sind wir es noch nicht im Kopfe... Der Kopfe, weil er die Dinge am gruendlichsten nimmt, wird auch am spaetesten frei")
* 계몽주의 ; 체제/시스템/이데올로기로 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종교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해방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범우주적 신적 차원에서의 "억압"적 체계를 전제로 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1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6 항 ]
범신론은 이론신학의 부정이고 경험론은 실천신학의 부정이다. 범신론은 신학의 원리를 부정하고 경험론은 신학의 결과를 부정한다.
범신론은 신을 현재의. 현실적인, 물질적인 본질로 생각하나 합리론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경험론은 신을 부재(不在)의 먼, 비현실적인, 부정적인 본질로 생각한다. 경험론은 신으로부터 그 실존을 박탈하지 않지만 모든 긍정적인 규정들을 박탈한다. 왜냐하면 실존의 내용은 유한하고 경험적인데 반하여 무한한 것은 인간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본질로 부터 규정을 더 많이 박탈하면 박탈할 수록 나는 그것을 나와 연관 밖에 놓는 것이며 나에 대한 세력이나 영향력을 더욱 감소하고 그로부터 나는 더욱 더 자유롭게 된다. 내가 특성을 많이 가지면 가질 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역할을 하며 나의 작용이나 영향력의 범위가 더욱 커진다. 한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에 관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신의 성질에 대한 모든 부정은 그러므로 부분적인 무신론이며 無神의 한 영역이다.
신으로부터 그 특성을 박탈하면 신으로부터 존재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관심이나 동정심이 신의 특성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나 혼자 고통을 당할 뿐이고 신은 더이상 위로가 되지 못한다. 신이 모든 유한자의 부정이라면 결과적으로 유한자 역시 신의 부정이다. 신이 나를 생각할 때만 내가 신을 생각 할 수 있는 근거와 원인이 나타난다고 종교인은 결론을 내린다.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곳에만 내가 신을 위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본질은 경험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론은 이러한 비존재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 속으로 즉 지식 속으로 갖다 놓는다. 경험론은 신으로부터 죽어 있고 무관한 그의 존재를 박탈하지 않으나 존재로서 실증되는 존재 즉 작용하고, 느낄 수 있고, 삶에 관여하는 존재는 박탈한다. 경험론은 신을 긍정하나 이 긍정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모든 결과를 부정한다. 경험론은 신학을 거부하고 포기하나 이론적인 근거에서가 아니고 신학의 대상들에 대한 혐오와 역겨움에서 즉 이러한 대상들의 비실재성에 대한 암담한 느낌에서이다.
'신학은 무(無)다' 라고 경험론자들은 스스로 생각하지만 거기에 덧 붙인다. '물론 나에게만' 이라고. 즉 그의 판단은 주관적이고 병리학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학의 대상들을 이성의 광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자유가 없을 뿐만아니라 의욕이나 소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철학의 소명이다. 새로운 철학의 과제는 그러므로 신학은 無라는 경험론자의 병리학적 판단을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올려 놓는 일에 불과하며 간접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부정적인 신학의 부정을 직접적이고, 긍정적이고, 의식적인 부정으로 전환시키는데 있다. 그러므로 경험의 무신론을 동시에 억누리지 않고 철학의 '무신론' 만을 억누르려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기독교의 이론적인 부정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근세가 떠들썩하게 된 기독교의 사실적인 부정을 용인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악의 의식 혹은 징후를 용인하면서 악의 원인을 동시에 지양하려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이러한 우스꽝스로운 일들이 얼마나 풍부한가! 그들은 모두 비판적인 시기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과거 속에서는 모든 것을 그대로 허용하고 이미 이루어진 변혁이나 혁명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현재의 경우에 적용하려 할 때 완강히 저항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근시안적 사고나 안일성 때문에 인간은 현재를 일반규칙의 예외로 만든다.
* 이론신학에서 신은 추상성 속에 존재하지만, 실천신학(대중 종교)에서 신은 구체성 속에 존재해야 한다.
나에게 이로움이 되는 신 - 그렇지 못하면 악마이다.
악마는 너무나 구체적인 현실로 존재하여 사사 건건 고통을 안겨 주기에,
신 또한 이에 대적해서 구체성 속에서 존재하고 나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종교에서의 그 기복(祈福)적 성격은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다.
- 건강(생로병사)/재물/복/행운과의 물물교환 속에서 신의 존재, 무게감이 드러난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0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5 항 ]
범신론은 신학적 무신론이고 신학적 유물론이며 스스로 신학의 입장에서 선 신학의 부정이다. 왜냐하면 범신론은 신의 부정인 물질을 신적 본질의 술어 혹은 속성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을 신의 속성으로 만드는 자는 물질을 바로 신적 본질로 규명하는 것과 같다. 신의실현은 일반적으로 신성 즉 현실적인 것의 진리와 본질을 전제로 한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 - 유물론, 경험론, 실재론 - 의 신화 즉 신학의 부정이 그러나 근세의 특질을 이룬다. 그러므로 범신론은 신적 본질과 종교철학적인 원리로 고조된 근세의 본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실재과학 특히 자연과학이 속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험론이나 실제론은 신학을 부정하지만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즉 활동을 통해서이다.
실재론자들은 신의 부정 혹은 적어도 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삶의 근본적인 요소로, 활동의 근본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정신과 마음을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초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실제로 박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활동의 대상이 되는 것만이 인간에게는 적어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나를 화내게 만들지 않는다" 감각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은 하나의 변명일 뿐이다. 신이나 신적인 사물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을 때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신에 관해서, 악마에 관해서, 천사에 관해서 알았던가! 이러한 초감성적인 본질들이 실제로 신앙의 대상이 되는한 그렇다. 사람들은 관심을 갖는것에 대해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갖는다.
중세 신비주의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을 발전 시킬 수 있는 힘이나 수완이 없었다. 의미가 있는 곳에 항상 감관이나 기관이 있다.
마음에 알려지는 것은 오성에 대해서도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세의 인간들이 초감성적인 세계와 그 비밀에 대한 기관을 상실한 것은 그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한 경향이 반기독교적이고 반신학적인 즉 인간학적이고 우주적이며 실재론적이고 유물론적이었기 때문이다(각주 3) 신은 연장이 있고 물질적인 본질이다 라는 역설적인 명제와 더불어 스피노자는 그러므로 정곡을 찔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세의 유물론적 경향에 대한 참된 철학적인 표현을 적어도 자기 시대에서 찾았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정당화하고 재가 했다. 즉 "신 자신이 유물론자이다"라는 표현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종교였고 스피노자 자신이 그러한 하나의 특색을 가졌다. 다른 많은 사람과는 달리 그에게는 유물론이 비물질적이고 반물질적인 신의 표상(表像)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신은 철저하게 반물질적이고 내세적인 경향과 업무를 인간에게 의무화시킨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원형이고 모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과 방식대로 되려고 하며 적어도 어느 땐가 그렇게 되리라 요망한다. 그러나 이론이 실천을 거부하지 않고 실천이 이론을 거부하지 않는 곳에서만 인격과 진리와 종교가 있다. 스피노자는 근대 자유주의정신주의자와 유물론자의 모세이다.
각주 3) 유물론, 경험론, 실재론, 휴머니즘 사이의 구분은 물론 여기 이 저서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 "의미가 있는 곳에 항상 감관이나 기관이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나를 화내게 만들지 않는다"
- 아는 것이 병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그리고 아는 만큼 의지한다.
* 모세의 기적은 절박함의 표현이다.
[ 제 15 항 ]
범신론은 신학적 무신론이고 신학적 유물론이며 스스로 신학의 입장에서 선 신학의 부정이다. 왜냐하면 범신론은 신의 부정인 물질을 신적 본질의 술어 혹은 속성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을 신의 속성으로 만드는 자는 물질을 바로 신적 본질로 규명하는 것과 같다. 신의실현은 일반적으로 신성 즉 현실적인 것의 진리와 본질을 전제로 한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 - 유물론, 경험론, 실재론 - 의 신화 즉 신학의 부정이 그러나 근세의 특질을 이룬다. 그러므로 범신론은 신적 본질과 종교철학적인 원리로 고조된 근세의 본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실재과학 특히 자연과학이 속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험론이나 실제론은 신학을 부정하지만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즉 활동을 통해서이다.
실재론자들은 신의 부정 혹은 적어도 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삶의 근본적인 요소로, 활동의 근본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정신과 마음을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초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실제로 박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활동의 대상이 되는 것만이 인간에게는 적어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나를 화내게 만들지 않는다" 감각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은 하나의 변명일 뿐이다. 신이나 신적인 사물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을 때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신에 관해서, 악마에 관해서, 천사에 관해서 알았던가! 이러한 초감성적인 본질들이 실제로 신앙의 대상이 되는한 그렇다. 사람들은 관심을 갖는것에 대해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갖는다.
중세 신비주의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을 발전 시킬 수 있는 힘이나 수완이 없었다. 의미가 있는 곳에 항상 감관이나 기관이 있다.
마음에 알려지는 것은 오성에 대해서도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세의 인간들이 초감성적인 세계와 그 비밀에 대한 기관을 상실한 것은 그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한 경향이 반기독교적이고 반신학적인 즉 인간학적이고 우주적이며 실재론적이고 유물론적이었기 때문이다(각주 3) 신은 연장이 있고 물질적인 본질이다 라는 역설적인 명제와 더불어 스피노자는 그러므로 정곡을 찔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세의 유물론적 경향에 대한 참된 철학적인 표현을 적어도 자기 시대에서 찾았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정당화하고 재가 했다. 즉 "신 자신이 유물론자이다"라는 표현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종교였고 스피노자 자신이 그러한 하나의 특색을 가졌다. 다른 많은 사람과는 달리 그에게는 유물론이 비물질적이고 반물질적인 신의 표상(表像)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신은 철저하게 반물질적이고 내세적인 경향과 업무를 인간에게 의무화시킨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원형이고 모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과 방식대로 되려고 하며 적어도 어느 땐가 그렇게 되리라 요망한다. 그러나 이론이 실천을 거부하지 않고 실천이 이론을 거부하지 않는 곳에서만 인격과 진리와 종교가 있다. 스피노자는 근대 자유주의정신주의자와 유물론자의 모세이다.
각주 3) 유물론, 경험론, 실재론, 휴머니즘 사이의 구분은 물론 여기 이 저서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 "의미가 있는 곳에 항상 감관이나 기관이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나를 화내게 만들지 않는다"
- 아는 것이 병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그리고 아는 만큼 의지한다.
* 모세의 기적은 절박함의 표현이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9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4 항 ]
사변철학은 신의 실현으로서 신의 긍정이고 동시에 신의 부정 혹은 지양이며 유신론이고 동시에 무신론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의미에서의 신은 인간 및 자연의 본질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본질로 상상될 때에만 신이기 때문이다. 신의 긍정이고 동시에 부정인 혹은 반대로 신의 부정이고 동시에 긍정인 유신론은 범신론이라 할 수 있다. 원래의 신학적인 유신론은 그러나 상상적인 범신론에 불과하고 상상적인 범신론은 실제의 참된 유신론에 불과하다.
유신론과 범신론을 구분지우는 것은 신을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상상한다는 것 뿐이다. 신에 대한 모든 규정은 - 신은 필연적으로 규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무(無)이고 상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 자연 혹은 인간의 현실성에 대한 규정이거나 양자에 공통되는 범신론적 규정이다. 왜냐하면 신을 자연이나 인간의 본질과 구분하지 않는 것이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그 규정이나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력이나 실존에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총체인 세계와 구분되며 신이 하나의 다른 본질로 상상될 뿐 실제로는 결코 다른 본질이 아니다. 유신론은 가상과 본질, 상상과 실제 사이의 모순이고 범신론은 양자의 통일이다. 즉 범신론은 밖으로 드러난 유신론(각주 2)의 진리이다. 유신론의 모든 상상들이 통찰되고 신중하게 고려되고, 관철되고, 실현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범신론으로 나아간다. 범신론은 철저한 유신론이다.
유신론은 신을 원인으로 즉 살아 있고 인격적인 원인,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했다 ; 신은 그의 의지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의지가 있는 곳에 오성도 있어야 된다. 의지하는 것은 오성의 일일뿐이다. 오성이 없이는 대상도 없다. 신이 창조한 사물들은 그러므로 창조되기 전에는 신 속의 오성의 대상으로, 오성의 본질로 들어 있었다. 신의 오성은 모든 사물과 본질의 총체이다라고 신학에서 말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無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 발생되겠는가? 그대가 이러한 無를 그대의 상상속에서 독립된 것으로 상상하든 신 속으로 옮겨 놓든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신 속에 내포되든가 이상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범신론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범신론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며 신의 본질로 부터 신의 실현까지도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오성이 본질로부터, 본질이 신의 현실이나 실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사물이 신의 오성 속에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신의 본질 밖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들이 오성의 결과라면 왜 본질의 결과가 아닌가? 신 속에서 신의 본질이 직접 그의 실현과 일치되고 신의 개념으로 부터 신의 실존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물에 대한 신의 개념 속에서 사물의 개념과 현실적인 사물이 분리될 수 있는가, 어떻게 신 속에서 유한하고 비(非)신적인 오성의 본질만이 구성할 수 있는 구분 즉 상상속의 사물과 상상밖의 사물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신의 오성 밖에서 사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신의 본질 밖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신의 실존 밖에서 사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사물은 상상에서 뿐만 아니라 활동이나 실제에서 신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사물이 신이나 인간의 상상속에만 즉 신 속에 관념적, 상상적으로 존재한다고 할때에 그들은 동시에 상상 밖에서 어떤 사물이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 밖에서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이상적이고상상된 신 뿐만아니라 실재적인 본질로서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한마디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이나 범신론에 도달하게 된다.
유신론은 신을 순수한 비물질적 본질로 상상한다. 그러나 신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물질을 비물질로 즉 하나의 유령으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신만이 현실적인 것의 척도이고 신만이 존재이고 진리이고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에 의해서 그리고 신 속에서 타당한 것만이 존재하며 신에 의해서 부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을 신으로 부터 연역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물질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연역이란 근거나 이유를 진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물질을 창조했다. 그러나 어떻게, 왜, 무엇으로부터 창조했는가? 이에 대해 유신론은 해답을 하지 못한다. 물질은 유신론에서 순수하게 규명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신학의 한계이고 종말이며 신학은 삶이나 사유에서와 똑같이 물질 때문에 난파한다. 그러므로 신학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어떻게 신학으로부터 신학의 종말과 그 부정인 물질을 연역할 수 있단 말인가? 오성이 출발하는 곳에서 어떻게 물질의 해명근거와 출처를 찾을 수 있는가? 신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물질과 세계의 부정으로 부터 어떻게 물질의 긍정, 즉 물질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로부터 물질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신학의 신을 거역하면서 추출해낼 수 있는가? 단순한 허구외에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가? 신 자체가 물질적인 본질로 규정될 때만 물질이 신으로부터 연력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만 신이 단순히 상상되고 표상되어진 원인으로부터 세계의 실제적인 원인으로 나아간다. 구두를 만드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자가 구두장이가 되고 구두장이라 불리우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스 작스는 물론 구두장이이고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구두들은 손의 작품이었고 시들은 두뇌의 작품이었다. 작용과 원인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물질은 신이 아니고 오히려 유한자, 非神的인 것,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질을 무조건 숭모하고 따르는 자들은 무신론자들이다. 범신론은 그러므로 유신론과 무신론을 결합하고 신과 신의 부정을 결합한다. 즉 여기서 신은 물질적인 존재이고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연장(延長)을 가진 존재이다.
각주 2) 그들의 최종적인 구분요소로 분석하면 물론 범신론과 유신론의 관계는 서로 다르게 규정된다. 즉 그 규정은 본인이 이미 다른 곳에서 내린 것과 같다.
* "신은 필연적으로 규정된다. 규정되지 않은 신은 무이다"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대화 ; "길들인다... 관계를 만든다는 것"
은 규정하는 것이다. 관계속에의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존재하고 인식되는 것이다.
* 사변철학-유신론의 귀결은 스피노자 철학-범신론... 그리고 범신론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유신론-범신론-관념론의 자기참조적 무한 순환구조.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 올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 아버지 신에게는 아주 곤란한 언명이다.
유일자로서의 신이 분열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피해야 한다. 결국 "내가 내이다"라고 주장 할 수 밖에 없는데...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8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3 항 ]
사변철학의 출발점인 절대적인 무조건성은 신적 본질의 무조건성, 무시성(無始性)에 불과하다. 신학은 신의 활동적인 성격과 정지된 성격을 구분한다. 그러나 철학은 정지된 성격마저도 활동적인 성격으로 바꾸고 신의 전(全)본질을 활동으로 즉 인간적인 활동으로 바꾼다. 이것은 신의 무조건성이나 무시성(無始性)에도 해당된다. 철학은 아무 전제도 없다 ; 이말은 철학이 직접적으로,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 즉 사유와 구분되는 대상을 개념화하고, 이런 모든 것을 개념화할 때 사유를 멈추지 않으며, 이런 모든 대상의 추상화를 스스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대적 본질이란 자기 외에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주어질 수 없고 모든 대상과 모든 구분될 수 있는 감각적인 사물로 부터 유리된 본질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단지 이러한 사물로부터 추상화됨으로써 대상이 되는 본질 외에 다른 무엇인가? 그대가 신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그대 자신도 자유로와야 하며 그러므로 그대가 신을 상상할 때만 그대는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 결국 그대가 신을 다른 어떤 본질이나 대상을 전제하지 않는 본질로 생각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다른 외적 대상을 전제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가 신 속으로 옮겨놓은 특성은 그대 자신의 사유특성이다. 신 속에서 존재로 혹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이 인간 속에서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기 때문에 바로 나다"라고 말하는 피히테의 자아나 헤걸의 전제없는 사유는 옛 신학과 형이상학의 신적 본질이 현재 나타나고 활동적이고 사유하는 인간 본질로 변한 것 외에 다른 무엇인가?
*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에 대한 정의, 철학의 대상, 철학의 놀이터 ;
"철학이 직접적으로,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 즉 사유와 구분되는 대상을 개념화하고,
이런 모든 것을 개념화할 때 사유를 멈추지 않으며, 이런 모든 대상의 추상화를 스스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
* 하지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절대적 본질' '필연성' '보편성' '완전성' '총체성' '오성과 이성' ' '추상성' '실재성'의 난무하는 개념과 용어들 ; 그건 들뢰즈가 말듯이 철학(적 논쟁들)은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들 뿐이다.
트위터(Twitter)나 버즈(Buzz)의 잡다한 토론과 논쟁, 수다들과 다를게 별반 없는... 웃자고 하는 이야기들... 직업이 철학인 분들이여, 너무 기분 나빠 하거나 화내지 마시길...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니까
Monday, April 26, 2010
젊은날의 파편 - 들뢰즈와의 조우(遭遇)
들뢰즈와 처음 인연은 강원도 동송읍 오지리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읽었던 일간지 신문에 실렸던 그의 죽음의 소식을 통해서였다. 당시 군대 행정병으로 근무해서 행정반에서 일간지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와 만났다. 그의 부고와 함께... 1995년 겨울.
기억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사는 조선일보의 기사였다. 아무튼 지금도 그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여 군 생활 기념품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죽음 소식과 함께 소개된 Bibliography..
"지난 4일(1995/11/04)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철학사의 비주류를 통해 주류를 전복시키려 했던 질 들뢰즈는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몇 안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로 꼽힌다.."
기자(이한우 - 쫌 유명? 했지...)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달아 놓았다.
"그의 돌연한 자살은 한가지 중대한 의문을 던져놓았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던 그가 왜 죽는 그날까지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책을 썼으면서도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단 한권의 저서도 쓰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그의 자살동기를 밝히는 것과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살, 즉 [욕망하는 기계]의 자폭이 자기이론의 고갈에서 온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자신이 푸코에 대해서 썼던 『푸코의 초상화』의 글 처럼 (관련글: http://uquehan.blogspot.kr/2012/08/foucault-2009-02-06-000222.html 참조) "자기이론의 고갈이나, 현실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Blade Runner의 삶을 살아온 결과이다.
이한우기자의 들뢰즈에 대한 부고 기사가 아무튼 제대 이후 취직하여 사회생활 하면서 들뢰즈의 자취를 찾아 헤메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기억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사는 조선일보의 기사였다. 아무튼 지금도 그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여 군 생활 기념품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죽음 소식과 함께 소개된 Bibliography..
"지난 4일(1995/11/04)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철학사의 비주류를 통해 주류를 전복시키려 했던 질 들뢰즈는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몇 안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로 꼽힌다.."
기자(이한우 - 쫌 유명? 했지...)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달아 놓았다.
"그의 돌연한 자살은 한가지 중대한 의문을 던져놓았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던 그가 왜 죽는 그날까지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책을 썼으면서도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단 한권의 저서도 쓰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그의 자살동기를 밝히는 것과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살, 즉 [욕망하는 기계]의 자폭이 자기이론의 고갈에서 온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자신이 푸코에 대해서 썼던 『푸코의 초상화』의 글 처럼 (관련글: http://uquehan.blogspot.kr/2012/08/foucault-2009-02-06-000222.html 참조) "자기이론의 고갈이나, 현실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Blade Runner의 삶을 살아온 결과이다.
이한우기자의 들뢰즈에 대한 부고 기사가 아무튼 제대 이후 취직하여 사회생활 하면서 들뢰즈의 자취를 찾아 헤메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7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2 항 ]
원형으로서의 사물에 앞서고 사물을 창조한 신의 지식 혹은 사유와 그 모사(模寫)로서 사물에 뒤따르는 인간지식 사이의 구분은 결국 선천적 혹은 사변적 지식과 후천적 혹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구별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신을 사유하는 본질 혹은 정신적인 본지로 상상함과 동시에 감각적인 본질로 상상한다. 그러므로 유신론은 신의 사유와 의지를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작용과 직접 결부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작용은 사유나 의지의 본질과 모순되는 자연의 힘을 표현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물질적인 작용은 - 결국 그것은 감성적인 힘의 단순한 표현이다 -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창조 내지 산출이다. 이에 반해 사변철학은 사유의 본질에 모순되는 이러한 감각적인 활동을 논리적 활동이나 이론적 활동으로 바꾸고 대상의 물질적 산출을 개념에 의한 사변적 산출로 바꾼다. 유신론에서 세계는 순간적인 산출물이다. 세계는 수천년 전 부터 존재해왔으나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신이 있었다. 이에 반해 사변신학에서는 세계나 자연은 그 의미나 서열상으로만 신 다음에 온다. 우연은 실체를 자연은 논리를 전제로 하나 개념에 따라서 일뿐 감각적 현존이나 시간에 따라서가 아니다.
유신론은 그러나 사변적이고 동시에 감각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을 가장 완고한 형태로서 신 속에 옮겨 놓는다. 그러나 세계와 대상에 앞서는 신의 지식이 사변철학의 선험적 지식에서 실현되고 진리와 현실을 얻는 것처럼 신에 대한 감각적인 지식도 근세의 경험과학들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고 진리와 현실을 얻는다. 가장 완전한 그러므로 신적인 감각적 지식은 결국 최고의 감각적 지식에 불과하며 가장 미세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개별성에 관한 지식이다. "신은 모든 개별물을 알고 있으므로 전지자이다"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무분별하게 한 갈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모든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알아내는 지식이다. 신학에서 하나의 표상이나 환상에 불과한 이러한 신의 지식은 그러나 자연과학의 망원경적, 현미경적 지식속에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지식이 되었다. 자연과학은 하늘의 별들을 세고, 물고기와 나비들의 배안에 있는 알을 세고 곤충의 날개에 있는 반점들을 세어 서로 구분해 놓았다. 자연과학만이 누에 유충의 머리속에서 288개, 몸통속에서 1,647개, 위와 장속에서 2,186개의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증명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해야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에 대한 인간의 표상이 인간종속에 대한 개인의 표상이며, 신은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의 총체로서 제한된 개체가 사용하도록 종속의 특성을 요약해서 종합한 총체에 불과하고 이러한 총체가 인간 속에서는 분열되어 있으나 세상사의 발전과정에서 실현된다는 확고한 진리의 예를 보게 된다. 자연과학들의 분야는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개관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 누가 하늘의 별들과 유충의 배에 있는 근육과 신경을 동시에 헤아릴 수 있는가? 뤼오네(Lyonet)는 누에 유충의 해부 때문에 고충을 겪었다. 누가 달속의 높낮이의 차이와 무수한 암몬조개와 테레브라텔 조개 사이의 구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가? 그러나 개별적인 인간이 알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인간들이 협력해서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개별적인 것을 동시에 하는 신적 지식은 인간종속(種屬)의 지식 속에 실재성을 갖는다.
인간속에 어디서나 실현되는 신의 현현(顯現)도 신의 전지(全知)와 비슷하다. 한 인간이 달아나 천왕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찰할 때 다른 사람은 금성을 관찰하고 혹은 유충의 내장이나 전지전능한 신의 지배아래 지금까지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어떤 곳을 관찰한다. 그렇다, 한 인간이 유럽의 위치에서 한 별을 관찰하는 동안 이 별을 동시에 미국의 위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두 사람에게는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모든 곳에 동시에 나타나며 모든 것을 동시에 구별없이 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전지전능이 표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앞에서 여러번 언급된 상상체와 현실체 사이의 주요한 구분은 간과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상상속에서 우리는 4,059개가 되는 유충의 근육을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그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현실속에서는 하나하나 차례로 관찰할 수 밖에 없다. 상상 속에서는 이렇게 제한된 개체가 인간지식의 전 범위를 제한된 방식으로라도 상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지식을 실제로 습득하려고 하면 결코 이 지식의 끝장에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역사라는 학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리고 상상속에서 세계사를 개별적인 국가의 역사로 나누어 보고 또 그것을 개별적인 주(州)의 역사로 또 그것을 다시 한 도시의 연대기로, 이 도시의 연대기를 가족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로 나누어 보자, 어떻게 한 개인이 "여기 나는 인류의 역사적 지식으 마무리하는 곳에 왔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우치에 도달할 수 있는가 ! 아무리 우리가 연장시켜서 생각한다 할 지라도 지나간 우리의 생애나 다가올 미래의 생애가 우리의 상상속에서는 지극히 짧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러한 짧은 시간을 사후의 무한하고 끝없는 삶으로 보충시킬 수 있는 상상의 순간에 빠져들어 감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루나 한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 그것은 상상속의 시간은 공허한 시간이며 우리가 계산하는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나온다. 실제의 생애는 그러나 모든 종류의 산같은 어려움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 놓여 있는 충족된 시간이다.
* Kant의 '선험적 지식'의 총체성 vs. 맨 바닥에서 또는 삽질을 통해 증명하게 되는 '경험적 지식'의 귀납성 (선험지식의 보완물, 또는 증거품) "아~ ! 내 뻘 짓은 결국은 알리바이 제공용이었구나" 하는 허탈감...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6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1 항 ]
신은 사유하는 본질이나 그것이 사유하는 대상들을 자체 속에 포함하고 오성처럼 스스로의 본질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사유하면서 스스로만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과 영원한 통일 속에 머물러 있다. 사유자와 사유된 것의 이러한 통일이 바로 사변적인 사유의 비밀이다.
[ 제 11 항 ]
신은 사유하는 본질이나 그것이 사유하는 대상들을 자체 속에 포함하고 오성처럼 스스로의 본질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사유하면서 스스로만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과 영원한 통일 속에 머물러 있다. 사유자와 사유된 것의 이러한 통일이 바로 사변적인 사유의 비밀이다.
예컨데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사유의 대상들이 사유의 본질과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사유가 스스로와 영속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 사유의 대상들은 단지 그 규정에 불과하며 사유 속으로 순수하게 동화되고 사유 밖에 있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논리학의 본질은 역시 신의 본질이다. 신은 하나의 정신이고 추상적인 본질이다 ; 그러나 신은 동시에 모든 본질을 내포하는 본질의 본질이고 스스로의 추상화된 본질과 일치한다. 그러나 추상화된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추상화된 본질 자체 즉 사유일 뿐이다. 신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은 신 밖에 있는 그런 사물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실제 직관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 구분되는 것 처럼 실제 사물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적인 사유와 형이상학적인 사유 사이의 구분은 어디로 환원되는가? 그것은 다만 상상력의 구분 즉 다만 상상된 사유와 실제 사유의 구분으로 환원된다.
* "그러나 논리학의 본질은 역시 신의 본질이다. 신은 하나의 정신이고 추상적인 본질이다" ; 어찌보면 헤겔(Hegel)의 위대함은 바로 그의 논변을 통해 신적 존재감의 무게, 그 이성적/논리적 타당성, 극으로 밀어부친 신적 본질의 추상성, 천변만화하는 운동의 논리를 일위관지(一爲貫之)로 풀어 냄에 있지 않을까 한다. - 여기서 신이라 함은 당연히 서구에서 인식된 기독교적 神을 지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엘리트주의 - “계몽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계몽주의 ; 감각/인식/사유/이성/본질에 대한 계몽된 능력... 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나 vs. 그렇지 못하는 너희 미천한 무리들. "절대정신의 간계"를 어찌 미천한 너희가 알 수 있겠는가?
* "그러나 논리학의 본질은 역시 신의 본질이다. 신은 하나의 정신이고 추상적인 본질이다" ; 어찌보면 헤겔(Hegel)의 위대함은 바로 그의 논변을 통해 신적 존재감의 무게, 그 이성적/논리적 타당성, 극으로 밀어부친 신적 본질의 추상성, 천변만화하는 운동의 논리를 일위관지(一爲貫之)로 풀어 냄에 있지 않을까 한다. - 여기서 신이라 함은 당연히 서구에서 인식된 기독교적 神을 지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엘리트주의 - “계몽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계몽주의 ; 감각/인식/사유/이성/본질에 대한 계몽된 능력... 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나 vs. 그렇지 못하는 너희 미천한 무리들. "절대정신의 간계"를 어찌 미천한 너희가 알 수 있겠는가?
Sunday, April 25,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5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0 항 ]
신은 순수한 정신이고 순수한 본질이며 순수한 활동이다. 냉정하고 외적 규정이 없으며 비(非)감성적이고 비물질적이다. 사변철학은 이와 같이 사유활동으로 실현된 순수한 정신이고 순수한 활동이며 - 절대적 사유로서 절대적 본질이다.
한때 모든 감각적, 물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상이 신학의 필수조건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또한 사변철학의 필수조건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신학의 추상은 그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인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감각적인 존재로 상상되기 때문에 그 자체 감각으로부터의 추상 즉 금욕인데 반해 사변철학의 추상은 하나의 정신적이고 사고하는 추상이므로 과학적 혹은 이론적인 의미만 가질뿐 실천적인 의미는 갖지 않는다.
데카르트철학의 출발 즉 감성이나 물질로 부터의 추상이 근세 사변철학의 발단이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쯔는 이러한 추상화를 비물질적인 신의 본질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조건으로만 고찰했으며 신의 비물질성을 추상과 사유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인 성질로 상상했다 ; 그들은 역시 유신론의 입장에 서 있었고, 비물질적인 본질을 철학 자체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의 주관, 활동원리 혹은 참된 본질로 생각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철학의 원리이지만 사유와 구별되는 객체로서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상상속에서 일 뿐 실제 현실속에서의 원리는 아니다. 신만이 물질과 운동과 활동의 보편적인 최초의 원인이다. 그러나 특수한 운동이나 활동들, 일정한 현실적인 물질존재들은 신과 독립해서 관찰되고 인식된다.
라이프니쯔와 데카르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관념론자이나 특수한 의미에서는 유물론자에 불과하다. 신만이 철저하고 완전한 참된 관념론자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즉 라이프니쯔 철학의 의미에서 감각이나 상상력과 무관한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신은 순수한 즉 모든 감성과 물질성으로부터 유리된 오성이다. 그러므로 신에게는 물질적인 존재가 순수한 오성 본질이며 순수한 사고이다. 신에게는 물질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은 다만 어둡고 감각적인 표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게 라이프니쯔에서는 인간도 어느 정도 관념론을 내포한다 ; 비물질적인 능력과 비물질적인 상상력을 갖지 않고 비물질적인 존재를 상상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감각이나 상상력 외에도 오성을 가졌는데 오성이란 사유하는 본질이기 때문에 비물질적이고 순수한 본질이다. 다만 인간의 오성은 완전히 순수하거나 제한을 받지 않고 연장이 없는 신의 오성이나 본질과는 다르다. 인간이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이다.
라이프니쯔는 그러므로 부분적인 관념론자 즉 반(半)관념론자이며 완전한 관념론자는 신 뿐이고 神 만이 볼프가 명명한 것처럼 '완전한 세계 현자(賢者)' 이다. 즉 신은 특수한 것에까지 관철하는 후기 사변철학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관념론이 내세우는 이념이다. 도대체 신의 오성과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속에서이든 상상속에서이든 일정한 시점에서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제 규정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오성이나 본질에 불과하다. 자기의 감각과 분열된 오성을 가지지 않는자는, 감각을 제한으로 느끼지 않는 자는 감각이 없는 오성을 최고의 참된 오성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이념이란 이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관되어 있는 현실때문에 받는 제한이나 애매함으로부터 정화된 이 사물의 본질이외에 다른 무엇인가? 라이프니쯔에 의하면 인간오성의 한계는 그것이 유물론 즉 어두운 표상들과 부착되어 있는데 있다. 그러나 어두운 표상들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다른 본질과, 다른 세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오성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오성과 모순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자체로 즉 이념속에서 비물질적인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립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념 즉 모든 물질적인 표상으로부터 정화된 이러한 오성은 바로 신적인 오성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쯔에서 이념에 불과했던 것이 그후의 철학에서는 진리와 현실이 되었다. 절대적 관념론은 라이프니쯔적인 유물론의 현실화된 신적인 오성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관철된 순수한 오성이며 모든 사물에서 감성을 박탈하고 그것을 순수한 오성의 본질로, 사유체로 만든, 이질적인 것과 섞이지 않는, 단지 그 자체로 즉 본질의 본질과 연관되는 오성이다.
* 추상(抽象)에서 구체(具體)로, 구체(具體)에서 추상(抽象)로의 숨가뿐 운동은 가히 개념과 절대정신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신은 (원리로서) 추상성속에 존재하고, 악마는 구체성속에 존재한다" vs. "신은 구체성속에 존재한다" 라는 언명.. 그렇듯 신의 존재는 구체와 추상을 숨가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 "神 만이 철저하고 완전한 참된 관념론자이다" ; 어찌보면 그것이 신의 존재 이유다.
불완전한 인간 vs. 완전한 神. 그런데 혼란의 중점은 주체와 대상에 대한 관점이다 ; 인식/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 vs. 使 하심의 주체로서의 神(그러나 결국은 '인식된' 神 일 수 밖에 없는...) 그 간극과 착종. 인간에게 구속된 가혹한 신의 운명.
* 나쁜 피가 섞이지 않은 순혈주의, 벙커주의 ; "스스로 존재하는, 다른 것과는 고립된, 순수한, 자기에게만 연관되고, 스스로의 대상이며 자기 자체안에만 내포하는"
* 라이프니쯔의 단자-Monad(e)-는 유물론적 파편이 아니라 신적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뉴런(Neuron)들이다.
[ 제 10 항 ]
신은 순수한 정신이고 순수한 본질이며 순수한 활동이다. 냉정하고 외적 규정이 없으며 비(非)감성적이고 비물질적이다. 사변철학은 이와 같이 사유활동으로 실현된 순수한 정신이고 순수한 활동이며 - 절대적 사유로서 절대적 본질이다.
한때 모든 감각적, 물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상이 신학의 필수조건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또한 사변철학의 필수조건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신학의 추상은 그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인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감각적인 존재로 상상되기 때문에 그 자체 감각으로부터의 추상 즉 금욕인데 반해 사변철학의 추상은 하나의 정신적이고 사고하는 추상이므로 과학적 혹은 이론적인 의미만 가질뿐 실천적인 의미는 갖지 않는다.
데카르트철학의 출발 즉 감성이나 물질로 부터의 추상이 근세 사변철학의 발단이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쯔는 이러한 추상화를 비물질적인 신의 본질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조건으로만 고찰했으며 신의 비물질성을 추상과 사유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인 성질로 상상했다 ; 그들은 역시 유신론의 입장에 서 있었고, 비물질적인 본질을 철학 자체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의 주관, 활동원리 혹은 참된 본질로 생각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철학의 원리이지만 사유와 구별되는 객체로서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상상속에서 일 뿐 실제 현실속에서의 원리는 아니다. 신만이 물질과 운동과 활동의 보편적인 최초의 원인이다. 그러나 특수한 운동이나 활동들, 일정한 현실적인 물질존재들은 신과 독립해서 관찰되고 인식된다.
라이프니쯔와 데카르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관념론자이나 특수한 의미에서는 유물론자에 불과하다. 신만이 철저하고 완전한 참된 관념론자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즉 라이프니쯔 철학의 의미에서 감각이나 상상력과 무관한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신은 순수한 즉 모든 감성과 물질성으로부터 유리된 오성이다. 그러므로 신에게는 물질적인 존재가 순수한 오성 본질이며 순수한 사고이다. 신에게는 물질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은 다만 어둡고 감각적인 표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게 라이프니쯔에서는 인간도 어느 정도 관념론을 내포한다 ; 비물질적인 능력과 비물질적인 상상력을 갖지 않고 비물질적인 존재를 상상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감각이나 상상력 외에도 오성을 가졌는데 오성이란 사유하는 본질이기 때문에 비물질적이고 순수한 본질이다. 다만 인간의 오성은 완전히 순수하거나 제한을 받지 않고 연장이 없는 신의 오성이나 본질과는 다르다. 인간이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이다.
라이프니쯔는 그러므로 부분적인 관념론자 즉 반(半)관념론자이며 완전한 관념론자는 신 뿐이고 神 만이 볼프가 명명한 것처럼 '완전한 세계 현자(賢者)' 이다. 즉 신은 특수한 것에까지 관철하는 후기 사변철학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관념론이 내세우는 이념이다. 도대체 신의 오성과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속에서이든 상상속에서이든 일정한 시점에서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제 규정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오성이나 본질에 불과하다. 자기의 감각과 분열된 오성을 가지지 않는자는, 감각을 제한으로 느끼지 않는 자는 감각이 없는 오성을 최고의 참된 오성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이념이란 이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관되어 있는 현실때문에 받는 제한이나 애매함으로부터 정화된 이 사물의 본질이외에 다른 무엇인가? 라이프니쯔에 의하면 인간오성의 한계는 그것이 유물론 즉 어두운 표상들과 부착되어 있는데 있다. 그러나 어두운 표상들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다른 본질과, 다른 세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오성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오성과 모순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자체로 즉 이념속에서 비물질적인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립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념 즉 모든 물질적인 표상으로부터 정화된 이러한 오성은 바로 신적인 오성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쯔에서 이념에 불과했던 것이 그후의 철학에서는 진리와 현실이 되었다. 절대적 관념론은 라이프니쯔적인 유물론의 현실화된 신적인 오성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관철된 순수한 오성이며 모든 사물에서 감성을 박탈하고 그것을 순수한 오성의 본질로, 사유체로 만든, 이질적인 것과 섞이지 않는, 단지 그 자체로 즉 본질의 본질과 연관되는 오성이다.
* 추상(抽象)에서 구체(具體)로, 구체(具體)에서 추상(抽象)로의 숨가뿐 운동은 가히 개념과 절대정신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신은 (원리로서) 추상성속에 존재하고, 악마는 구체성속에 존재한다" vs. "신은 구체성속에 존재한다" 라는 언명.. 그렇듯 신의 존재는 구체와 추상을 숨가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 "神 만이 철저하고 완전한 참된 관념론자이다" ; 어찌보면 그것이 신의 존재 이유다.
불완전한 인간 vs. 완전한 神. 그런데 혼란의 중점은 주체와 대상에 대한 관점이다 ; 인식/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 vs. 使 하심의 주체로서의 神(그러나 결국은 '인식된' 神 일 수 밖에 없는...) 그 간극과 착종. 인간에게 구속된 가혹한 신의 운명.
* 나쁜 피가 섞이지 않은 순혈주의, 벙커주의 ; "스스로 존재하는, 다른 것과는 고립된, 순수한, 자기에게만 연관되고, 스스로의 대상이며 자기 자체안에만 내포하는"
* 라이프니쯔의 단자-Monad(e)-는 유물론적 파편이 아니라 신적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뉴런(Neuron)들이다.
젊은날의 파편 - 법정스님의 [무소유] 스크랩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에서 읽었던 법정(法頂) [무소유]의 흔적
문득 옛날 군 시절의 잔재(이런 저런 군 생활 사진들과 제대 앞둔 말년에 끄적거리던 이런 저런 단상들을 모아 놓은 - 보통 말년 병장들이 만들던 제대 기념 축하 앨범 비스무리 한 그런 것)을 살피다가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 글을 Scrap 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당시 행정병으로 근무했던지라 포대의 행정반에서 타자기로 찍어서 만들어 놓은 것.
* 무학(無學)
-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
-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하라
* 회심(回心)
-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 시키는 것.
-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침묵(沈默)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나에게 책(경전) 한권이 있으나 종이와 묵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비록 거기에는 한 글자도 쓰여지지 않았지만(펼쳐보아도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 삶과 죽음이란 한 무더기의 구름이 스스르 일었다가 스러져 가는 것과도 같음이라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문득 옛날 군 시절의 잔재(이런 저런 군 생활 사진들과 제대 앞둔 말년에 끄적거리던 이런 저런 단상들을 모아 놓은 - 보통 말년 병장들이 만들던 제대 기념 축하 앨범 비스무리 한 그런 것)을 살피다가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 글을 Scrap 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당시 행정병으로 근무했던지라 포대의 행정반에서 타자기로 찍어서 만들어 놓은 것.
* 무학(無學)
-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
-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하라
* 회심(回心)
-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 시키는 것.
-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침묵(沈默)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나에게 책(경전) 한권이 있으나 종이와 묵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비록 거기에는 한 글자도 쓰여지지 않았지만(펼쳐보아도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 삶과 죽음이란 한 무더기의 구름이 스스르 일었다가 스러져 가는 것과도 같음이라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Saturday, April 24,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4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8 항 ]
일반신학은 인간의 관점을 신의 관점으로 만든다. 이에 반해 사변신학은 신의 관점을 인간의 관점 혹은 오히려 사유자의 관점으로 만든다.
신은 일반신학의 대상이고 다른 감각적인 대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신은 다시 인간적인 주관과 똑같은 주관이 된다 ; 신은 사물을 자신 밖에서 산출하고 자기와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다른 본질에 연관되며 자기와 다른 본질을 동시에 사랑하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까지도 신의 사고와 감정으로 만들고 스스로의 본질과 입장을 신의 본질과 입장으로 만든다. 사변신학은 그러나 이것을 뒤바꾼다. 그러므로 일반신학에서는 신이 스스로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신은 비인간적이고, 초인간적이어야 되는데 그러나 신의 제규정에 따르면 실제로 하나의 인간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변신학이나 사변철학에서는 이에 반해 신이 인간과 모순된다. 신은 인간의 본질, 적어도 이성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실제로 하나의 비인가넉이고 초인간적인 즉 추상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초월한 신이 일반신학에서는 산뜻한 미사여구, 상상, 환상의 장난감에 불과하나 사변철학에서는 이에 반해 진리이고 아주 진지한 것이다. 사변철학이 갖는 극심한 모순은 유신론에서 환상의 본질이고 동떨어져 있으며 규정되지 않는 애매한 본질에 불과한 신을 현재의 규정된 본질로 만들고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상상의 푸른 안개속에서 갖는 환성적인 마력을 깨뜨려 버리는데 근거한다. 헤겔에서의 논리학이 세계 이전의 신적 본질을 표현한 것이지만 예컨대 수량론(數量論)에서 처럼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크기, 분수, 자승, 용적 등을 다룬다이고 유신론자들은 불만을 표시한다. 이러한 신이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신이 된단 말인가?라고 그들은 깜짝 놀라서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신은 무(無)규정적인 상상의 안개로부터 규정하는 사고의 빛으로 다가서고 모든 것을 척도, 숫자, 무게에 따라서 창조하고 정돈하는 유신론의 신으로부터 명확하게 언질을 받는 신 외에 어떤 다른 것인가? 신이 모든 것을 숫자와 척도에 따라 정리하라고 창조했다면 즉 척도와 숫자가 신 외의 사물 속에 현실화 되기 전에 신의 오성과 본질에 포함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포함이 된다며(왜냐하면 신의 오성과 본질사이에는 구분이 없으므로) 수학도 역시 신학의 비밀에 속하지 않는가? 그러나 물론 하나의 본질은 상상속에서 현실속에서와는 달리 보인다 ; 외형이나 가상만을 쫓는 사람에게 하나의 똑같은 본질이 전혀 다른 두개의 본질로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제 9 항 ]
신적(神的) 본질의 주요한 특성이나 술어는 사변철학의 주요한 특성이고 술어이다.
* Hegel의 정신현상학, 논리학, 역사철학...은
신적 본질과 절대정신의 운동에 대한 무성생식과도 같은 "절대정신"의 자서전(自敍傳)이었다.
* Keyboard를 거쳐 Wi-Fi 와 Info-Bahn 을 타고 Network 속으로까지 편재(偏在)해야 함에 대해...
神은 이미 "예정' 했던 것일까? 아님, 생각지도 못했던 0과 1의 도전에 대한
새로운 '존재'와 '본질' 그리고 '개념'의 운동을 제시하여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여야 하는 괴로움에 자괴감을 느꼈을까?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3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7 항 ]
유신론에서 객관인 것이 사변철학에서는 주관이 되고 거기서 사유되고 상상된 이성의 본질이 여기서는 이성 자체의 사유하는 본질이 된다.
유신론자는 신을 이성과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실존적이고 인격적인 본질로 상상한다 - 그는 주체로서 객체인 신을 사유한다. 그는 신을 그 본질에 즉 표상에 따라서는 정신적이고 비(非)감성적인 그러나 실존 즉 진리에 따라서는 감성적인 본질로 생각한다 ; 왜냐하면 객관적 실존 즉 사고나 표상의 밖에 있는 실존의 본질적인 징표는 감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 대상과 본질을 자기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와 구분하는 것 처럼 신과 자신을 구분한다 ; 간단히 말하면 그는 신을 감성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사변신학자나 철학자는 이에 반해 사유으 이비장에서 신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와 신 사이의 중간에 감성적 본질이라는 성가신 표상을 갖지 않는다 ;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객관적이고 사유된 본질을 주관적이고 사유하는 본질과 일치 시킨다.
신이 인간의 객관으로부터 주관 즉 인간의 사유하는 자아가 되는 내적 필연성은 이미 전개한 논리에 부가해서 다음과 같이 더 잘 설명된다 ; 신은 인간의 대상이며 더욱 동물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만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그 대상을 통해 인식된다 ; 본질이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대상은 그 자체의 본질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초식동물의 대상은 식물이다 ; 이러한 대상을 통해 초식동물은 다른 동물 즉 육식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시각의 대상은 냄새나 음이 아니라 빛이다. 시각의 대상속에서 시각의 본질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한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과 눈이 없는 것은 그러므로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속에서도 우리는 사물이나 본질을 그 대상에 따라 명명한다. 눈은 '빛기관'이다.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농부다, 사냥을 활동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사냥군이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은 어부다 등. 그러므로 신(물론 있는 그 자체로 필연적이고 본질적인)이 인간의 대상이라면 이 대상의 본질 속에는 인간 자신의 본질이 진술되었을 뿐이다. 항성이나 유성 위에서 하나의 사유하는 본질이 신의 본질을 다루는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몇 구절을 보았다고 상상해 보라. 이러한 구절에서 그는 무엇을 추출할 것인가? 대강 기독교 도그마와 같은 의미에서 신의 존재를? 아니다! 그는 다만 지구상에도 사유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추출할 것이다 ; 신에 대한 지구인의 정의에서 그 자신들의 본질에 대한 정의, 예컨대 신은 정신이라는 정의 속에 그들 자신의 정신에 대한 증명과 표현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 요약하면 대상의 본질이나 특징으로부터 주관의 본질이나 특징만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상 자체와 현상으로서의 대상 사이의 구분이 이 대상물에서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바로 감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외의 다른 본질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는 것에서만 가능하다. 빛은 인간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비유기적인 물질까지도 자극한다 ;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본질이다. 빛의 본질을 체득하기 위해서 빛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나 작용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구분되는 다른 존재에 대한 그것들도 관찰한다. 그러므로 대상 자체와 인간을 위한 대상 즉 현실 속에서의 대상과 인간의 사유나 상상속에서의 대상 사이의 구분은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다. 신은 그러나 다만 인간의 대상일 뿐이다. 동물과 별들이 신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일 뿐이다. 신이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특수한 인간적인 대상이며 인간의 비밀이라는 것은 신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대상에 불과할 때 신의 본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질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최고의 본질을 대상으로 갖는 자는 스스로 최고의 본질이다. 인간을 더 많이 대상으로 삼는 동물일 수록 그들은 점점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점점 더 인간에게 접근한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즉 인간 본래의 본질을 대상으로 갖는 동물은 이미 동물이 아니고 인간 자신일 뿐이다. 동등한 본질만이 그것의 대상이 되고 물론 이때에도 있는 그 자체로 대상이 된다. 신과 인간의 본질이 일치하는 것은 항상 유신론자의 의식 속에서이다. 그러나 유신론자는 그가 신의 본질을 정신으로 설정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신을 인간 외에서 존재하는 감각적인 본질로 상상하기 때문에 이들의 일치는 다만 감각적인 일치이고 유사성 혹은 상관성으로 대상이 된다. 상관성은 동일성과 똑같은 것을 표현하나 상관되는 본질은 두개의 독자적인 말하자면 감성적이고 서로서로의 밖에 존재하는 본질을 상상하는 감성적인 표상과 동시에 결부된다.
* 전통적 종교로서의 신앙은 외적 대상과 결부되어 있다 ;
神은 "인간의 대상"이며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신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개념은 종교/신앙의 영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 제 7 항 ]
유신론에서 객관인 것이 사변철학에서는 주관이 되고 거기서 사유되고 상상된 이성의 본질이 여기서는 이성 자체의 사유하는 본질이 된다.
유신론자는 신을 이성과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실존적이고 인격적인 본질로 상상한다 - 그는 주체로서 객체인 신을 사유한다. 그는 신을 그 본질에 즉 표상에 따라서는 정신적이고 비(非)감성적인 그러나 실존 즉 진리에 따라서는 감성적인 본질로 생각한다 ; 왜냐하면 객관적 실존 즉 사고나 표상의 밖에 있는 실존의 본질적인 징표는 감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 대상과 본질을 자기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와 구분하는 것 처럼 신과 자신을 구분한다 ; 간단히 말하면 그는 신을 감성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사변신학자나 철학자는 이에 반해 사유으 이비장에서 신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와 신 사이의 중간에 감성적 본질이라는 성가신 표상을 갖지 않는다 ;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객관적이고 사유된 본질을 주관적이고 사유하는 본질과 일치 시킨다.
신이 인간의 객관으로부터 주관 즉 인간의 사유하는 자아가 되는 내적 필연성은 이미 전개한 논리에 부가해서 다음과 같이 더 잘 설명된다 ; 신은 인간의 대상이며 더욱 동물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만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그 대상을 통해 인식된다 ; 본질이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대상은 그 자체의 본질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초식동물의 대상은 식물이다 ; 이러한 대상을 통해 초식동물은 다른 동물 즉 육식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시각의 대상은 냄새나 음이 아니라 빛이다. 시각의 대상속에서 시각의 본질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한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과 눈이 없는 것은 그러므로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속에서도 우리는 사물이나 본질을 그 대상에 따라 명명한다. 눈은 '빛기관'이다.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농부다, 사냥을 활동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사냥군이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은 어부다 등. 그러므로 신(물론 있는 그 자체로 필연적이고 본질적인)이 인간의 대상이라면 이 대상의 본질 속에는 인간 자신의 본질이 진술되었을 뿐이다. 항성이나 유성 위에서 하나의 사유하는 본질이 신의 본질을 다루는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몇 구절을 보았다고 상상해 보라. 이러한 구절에서 그는 무엇을 추출할 것인가? 대강 기독교 도그마와 같은 의미에서 신의 존재를? 아니다! 그는 다만 지구상에도 사유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추출할 것이다 ; 신에 대한 지구인의 정의에서 그 자신들의 본질에 대한 정의, 예컨대 신은 정신이라는 정의 속에 그들 자신의 정신에 대한 증명과 표현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 요약하면 대상의 본질이나 특징으로부터 주관의 본질이나 특징만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상 자체와 현상으로서의 대상 사이의 구분이 이 대상물에서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바로 감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외의 다른 본질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는 것에서만 가능하다. 빛은 인간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비유기적인 물질까지도 자극한다 ;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본질이다. 빛의 본질을 체득하기 위해서 빛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나 작용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구분되는 다른 존재에 대한 그것들도 관찰한다. 그러므로 대상 자체와 인간을 위한 대상 즉 현실 속에서의 대상과 인간의 사유나 상상속에서의 대상 사이의 구분은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다. 신은 그러나 다만 인간의 대상일 뿐이다. 동물과 별들이 신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일 뿐이다. 신이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특수한 인간적인 대상이며 인간의 비밀이라는 것은 신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대상에 불과할 때 신의 본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질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최고의 본질을 대상으로 갖는 자는 스스로 최고의 본질이다. 인간을 더 많이 대상으로 삼는 동물일 수록 그들은 점점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점점 더 인간에게 접근한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즉 인간 본래의 본질을 대상으로 갖는 동물은 이미 동물이 아니고 인간 자신일 뿐이다. 동등한 본질만이 그것의 대상이 되고 물론 이때에도 있는 그 자체로 대상이 된다. 신과 인간의 본질이 일치하는 것은 항상 유신론자의 의식 속에서이다. 그러나 유신론자는 그가 신의 본질을 정신으로 설정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신을 인간 외에서 존재하는 감각적인 본질로 상상하기 때문에 이들의 일치는 다만 감각적인 일치이고 유사성 혹은 상관성으로 대상이 된다. 상관성은 동일성과 똑같은 것을 표현하나 상관되는 본질은 두개의 독자적인 말하자면 감성적이고 서로서로의 밖에 존재하는 본질을 상상하는 감성적인 표상과 동시에 결부된다.
* 전통적 종교로서의 신앙은 외적 대상과 결부되어 있다 ;
神은 "인간의 대상"이며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신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개념은 종교/신앙의 영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Friday, April 23,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제 6 항 ]
신 으로서의 신 즉 정신적이고 추상적이며, 인간적, 감각적이 아닌, 다만 이성이나 예지에만 통용되고 대상화되는 본질은 이성 자체의 본질에 불과한데 이 본질이 일반신학이나 유신론에 의해 상상력의 도움으로 이성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본질로 상상된다. 그러므로 이성과 구분된 이성의 본질이 결국 이성과 일치된다는 것, 신의 본질이 이성의 본질로 인식되고, 실현되고, 현현된다는 것은 성스러운 내적(內的) 필연이다. 사변철학의 지고한 역사적 의미는 이러한 필연성에 기인한다. 신의 본질이 이성 혹은 예지의 본질이라는 증거는 신의 속성이나 규정이 이성의 속성이라는데 있다 (물론 신의 속성이나 규정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규정이며 감성이나 상상력의 규정이 아니다)
" 신은 무한한 본질 즉 모든 제한을 벗어난 본질이다" 그러나 신의 한계나 제한이 아닌 것은 역시 이성의 한계가 되지 않는다. 예컨데 신이 감성의 제한을 넘어서는 숭고한 본질일때 이성도 역시 그렇다. 감각적인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감성에 의해서 제한된 이성만을 가진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감성에 의해서 제한된 신을 갖는다. 신을 무제한적인 본질로 생각하는 이성은 신 속에서 단지 자신의 무제한성을 생각한다. 이성에 대해 신적(神的)인 것만이 참다운 이성적 본질, 즉 완전히 이성에 합당하고 그것 때문에 이성을 만족시키는 본질이다. 그러나 하나의 본질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은 이 본질 자체가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한 시인 속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스스로 시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고 철학자 속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스스로 철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가 그런 소양이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만족에서 비로소 자타(自他)의 대상이 된다. 이성은 "그러나 감각적이고 유한한 사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 그것은 무한한 존재 속에서만 만족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질 속에서 비로소 이성의 본질이 드러난다 .
" 신은 필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그가 이성적, 예지적 존재라는데 근거한다. 세계와 물질은 왜 그것이 현재 있는 상태로 되어 있는가 라는 근거를 자체속에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지금과 같은 상태이냐 다른 상태이냐 라는 것이 물질에서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각주 1)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다른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이성적이고, 자의식적(自意識的)이며, 근거와 목적에 작용을 하는 하나의 본질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다른 본질로부터 예지를 박탈하면 그 자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 새로이 발생한다. 최초의 지고한 존재의 필연성은 그러므로 오성만이 유일하게 최초의, 지고한, 필연적인, 참된 본질이라는 전제위에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규정들이 심리학 혹은 인간학적 규정으로 환원될 때만 진리나 실재성을 얻는 것 처럼 종래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신적 본질이라는 필연성도 신이 하나의 예지적 존재로 심리학적 혹은 인간학적 견지에서 규정될 때만 의미와 합당성, 진리와 실재성을 갖는다. 필연적인 본질이란 필연적으로 사유되어지고 절대적으로 긍정되는 그러므로 부정할 수 없고 지양될 수 없는 본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사유하는 본질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필연적인 본질속에서 자신의 필연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고 제시한다.
" 신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이며 - 신은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 불변하고 영원하고 무시간적인 본질이다" 그러나 무조건성, 불변성, 영원성, 보편성까지도 형이상학적인 신학의 판단에 의하면 이성적인 진리나 이성적인 법칙의 특성이고 결과적으로 이성 자체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변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항상 어디서나 타당한 이성의 진리란 이성 자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외에 도대체 다른 무엇인가?
" 신은 독자적이고 독립된 본질로서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본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을 통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규정도 역시 오성의 본질규정으로서만 의미와 실재성을 가진다. 따라서 신이란 사유하는 예지적인 본질, 혹은 반대로 사유하는 본질만이 신적 본질이다 라는 것을 의미할뿐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본질만이 그가 존재하기 위해 그 외의 다른 사물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기 위해 우리는 공기를 필요로하고, 마시기 위해 물을, 보기위해 빛을, 먹기 위해서 동식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직접적으로 다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기없이 숨쉬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고, 빛없이 볼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나 사유하는 존재는 그 자체로 고랩해서 생각할 수 있다. 숨쉬는 존재는 존재의 필연적으로 그 외의 다른 본질에 연관되고 그가 지금 있는 상태를 가능하게하는 본질적인 대상을 자기 외에서 갖는다 ; 그러나 사유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만에 연관되고 스스로의 대상이며 자기 본질을 자기 자체안에 내포하고 자기 자체만을 통해서 현상태로 그가 존재하는 것이다.
- 각주 1) 사적(史的) 대상을 다루고 전개시키는 다른 항목에서 처럼 여기에서도 내 생각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대상의 의미에서,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유신론의 의미에서 말해지고 논의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神"에 대한 '이성적(理性的)' 접근/판단/이해...
신은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헤겔관념론은 신의 이성적 본질에 대한 신학이다. 그런데 이게 이종교배는 되지 않는다.
스스로와 관계하고 스스로의 대상이되며 자기의 본질을 자기 자체안에 내포하고 자기 자체만을 통해서 현현하고 운동한다.
[ 제 6 항 ]
신 으로서의 신 즉 정신적이고 추상적이며, 인간적, 감각적이 아닌, 다만 이성이나 예지에만 통용되고 대상화되는 본질은 이성 자체의 본질에 불과한데 이 본질이 일반신학이나 유신론에 의해 상상력의 도움으로 이성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본질로 상상된다. 그러므로 이성과 구분된 이성의 본질이 결국 이성과 일치된다는 것, 신의 본질이 이성의 본질로 인식되고, 실현되고, 현현된다는 것은 성스러운 내적(內的) 필연이다. 사변철학의 지고한 역사적 의미는 이러한 필연성에 기인한다. 신의 본질이 이성 혹은 예지의 본질이라는 증거는 신의 속성이나 규정이 이성의 속성이라는데 있다 (물론 신의 속성이나 규정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규정이며 감성이나 상상력의 규정이 아니다)
" 신은 무한한 본질 즉 모든 제한을 벗어난 본질이다" 그러나 신의 한계나 제한이 아닌 것은 역시 이성의 한계가 되지 않는다. 예컨데 신이 감성의 제한을 넘어서는 숭고한 본질일때 이성도 역시 그렇다. 감각적인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감성에 의해서 제한된 이성만을 가진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감성에 의해서 제한된 신을 갖는다. 신을 무제한적인 본질로 생각하는 이성은 신 속에서 단지 자신의 무제한성을 생각한다. 이성에 대해 신적(神的)인 것만이 참다운 이성적 본질, 즉 완전히 이성에 합당하고 그것 때문에 이성을 만족시키는 본질이다. 그러나 하나의 본질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은 이 본질 자체가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한 시인 속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스스로 시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고 철학자 속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스스로 철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가 그런 소양이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만족에서 비로소 자타(自他)의 대상이 된다. 이성은 "그러나 감각적이고 유한한 사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 그것은 무한한 존재 속에서만 만족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질 속에서 비로소 이성의 본질이 드러난다 .
" 신은 필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그가 이성적, 예지적 존재라는데 근거한다. 세계와 물질은 왜 그것이 현재 있는 상태로 되어 있는가 라는 근거를 자체속에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지금과 같은 상태이냐 다른 상태이냐 라는 것이 물질에서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각주 1)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다른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이성적이고, 자의식적(自意識的)이며, 근거와 목적에 작용을 하는 하나의 본질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다른 본질로부터 예지를 박탈하면 그 자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 새로이 발생한다. 최초의 지고한 존재의 필연성은 그러므로 오성만이 유일하게 최초의, 지고한, 필연적인, 참된 본질이라는 전제위에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규정들이 심리학 혹은 인간학적 규정으로 환원될 때만 진리나 실재성을 얻는 것 처럼 종래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신적 본질이라는 필연성도 신이 하나의 예지적 존재로 심리학적 혹은 인간학적 견지에서 규정될 때만 의미와 합당성, 진리와 실재성을 갖는다. 필연적인 본질이란 필연적으로 사유되어지고 절대적으로 긍정되는 그러므로 부정할 수 없고 지양될 수 없는 본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사유하는 본질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필연적인 본질속에서 자신의 필연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고 제시한다.
" 신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이며 - 신은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 불변하고 영원하고 무시간적인 본질이다" 그러나 무조건성, 불변성, 영원성, 보편성까지도 형이상학적인 신학의 판단에 의하면 이성적인 진리나 이성적인 법칙의 특성이고 결과적으로 이성 자체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변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항상 어디서나 타당한 이성의 진리란 이성 자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외에 도대체 다른 무엇인가?
" 신은 독자적이고 독립된 본질로서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본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을 통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규정도 역시 오성의 본질규정으로서만 의미와 실재성을 가진다. 따라서 신이란 사유하는 예지적인 본질, 혹은 반대로 사유하는 본질만이 신적 본질이다 라는 것을 의미할뿐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본질만이 그가 존재하기 위해 그 외의 다른 사물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기 위해 우리는 공기를 필요로하고, 마시기 위해 물을, 보기위해 빛을, 먹기 위해서 동식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직접적으로 다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기없이 숨쉬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고, 빛없이 볼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나 사유하는 존재는 그 자체로 고랩해서 생각할 수 있다. 숨쉬는 존재는 존재의 필연적으로 그 외의 다른 본질에 연관되고 그가 지금 있는 상태를 가능하게하는 본질적인 대상을 자기 외에서 갖는다 ; 그러나 사유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만에 연관되고 스스로의 대상이며 자기 본질을 자기 자체안에 내포하고 자기 자체만을 통해서 현상태로 그가 존재하는 것이다.
- 각주 1) 사적(史的) 대상을 다루고 전개시키는 다른 항목에서 처럼 여기에서도 내 생각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대상의 의미에서,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유신론의 의미에서 말해지고 논의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神"에 대한 '이성적(理性的)' 접근/판단/이해...
신은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헤겔관념론은 신의 이성적 본질에 대한 신학이다. 그런데 이게 이종교배는 되지 않는다.
스스로와 관계하고 스스로의 대상이되며 자기의 본질을 자기 자체안에 내포하고 자기 자체만을 통해서 현현하고 운동한다.
Thursday, April 22,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1 - Feuerbach, 1843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Feuerbach, 1843
- 강대석 譯, 이문출판사, 1983년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 항 ]
근세의 과제는 신(神)의 실현이고 인간화(人間化)였다. 즉 신학을 인간학으로 바꾸고 용해시키는 일이었다.
[ 제 2 항 ]
이 러한 인간화의 종교적 혹은 실천적 방식이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인간인 동시에 신 그러므로 인간적인 신인 그리스도만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과는 달리 신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보다는 신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처럼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경향을 갖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신학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기독학(Christologie) 즉 종교적 인간학일 뿐이다.
[ 제 3 항 ]
프로테스탄티즘은 신(神) 자체 혹은 신으로서의 신 - 왜냐하면 신 자체가 비로소 본래의 신이므로 - 을 실천적인 의미에서만 부정한다. 이론적으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 즉 종교적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신은 내세(來世)의 본질로 천국에서야 비로소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종교의 내세에 있는 것이 철학의 현세(現世)에 있고 종교의 대상이 아닌 것이 바로 철학의 대상이다.
[ 제 4 항 ]
종교에서 내세적(來世的)이고 비(非)대상적인 신을 합리적 혹은 이론적으로 조작하고 해명하는 것이 사변철학이다.
[ 제 5 항 ]
사변철학의 본질은 합리화되고, 현실화되고, 대상화된 신의 본질에 불과하다. 사변철학은 참되고, 철저하고, 이성적인 신학이다.
* 여기서의 사변철학은 독일고전관념론, 즉 헤겔철학을 의미한다.
- 강대석 譯, 이문출판사, 1983년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 항 ]
근세의 과제는 신(神)의 실현이고 인간화(人間化)였다. 즉 신학을 인간학으로 바꾸고 용해시키는 일이었다.
[ 제 2 항 ]
이 러한 인간화의 종교적 혹은 실천적 방식이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인간인 동시에 신 그러므로 인간적인 신인 그리스도만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과는 달리 신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보다는 신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처럼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경향을 갖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신학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기독학(Christologie) 즉 종교적 인간학일 뿐이다.
[ 제 3 항 ]
프로테스탄티즘은 신(神) 자체 혹은 신으로서의 신 - 왜냐하면 신 자체가 비로소 본래의 신이므로 - 을 실천적인 의미에서만 부정한다. 이론적으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 즉 종교적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신은 내세(來世)의 본질로 천국에서야 비로소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종교의 내세에 있는 것이 철학의 현세(現世)에 있고 종교의 대상이 아닌 것이 바로 철학의 대상이다.
[ 제 4 항 ]
종교에서 내세적(來世的)이고 비(非)대상적인 신을 합리적 혹은 이론적으로 조작하고 해명하는 것이 사변철학이다.
[ 제 5 항 ]
사변철학의 본질은 합리화되고, 현실화되고, 대상화된 신의 본질에 불과하다. 사변철학은 참되고, 철저하고, 이성적인 신학이다.
* 여기서의 사변철학은 독일고전관념론, 즉 헤겔철학을 의미한다.
다시 읽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이리저리 많은 이사 도중에도 버려지지 않고 책꽂이 한켠을 지키고 있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의 책 ; [기독교의 본질], 그리고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대학시절... [독일철학강좌회]라는 동아리 활동 할때 잠깐 읽던 책. 당시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의 틈바구니속에서 헤겔로 표상되는 독일관념론 철학의 비판에 대한,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대상으로 읽혔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누렇게 변색되고 종이도 꺼칠해졌다.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외], 1843, Ludwig Feuerbach - 이문출판사, 강대석 옮김, 1983년, 값 2,000원
"오래된"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기독교에 대한 비판 ; 아마도 그 정신적 일맥이 키에르케고르, 니체 등과 이어지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 비판자의 모습을 띤다라고 해서 "반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호교론"에 가깝다라는게 내 생각.
[미래철학의 근본원칙]은 키보드로 옮겨 적으면서 블로그로 archiving을 해 봐야 겠다.
Wednesday, April 14, 2010
[시대단상] “차상위계층”…
나는 차상위계층의 의미가 次上位, 즉 상위계층의 다음 단계- 중산층인 줄 알았다. 음… 그런데 그게 아니라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계층이란다.
<차상위계층이란…
차상위계층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가 아닌 가구로서, 소득 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가구가 해당된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이나 재산으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정부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 각종 지원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약간 상회하는 소득이나 재산 수준으로 기초생활대상자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여전히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보다 열악한 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 바로 차상위계층이다>
그렇다면 정부 정책을 적용하기 위한 대상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상위계층… 사회학적으로는 애매모호한 개념이지만, 뭐 아무튼 정책적용 대상자의 자존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세심한 배려?
<차상위계층이란…
차상위계층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가 아닌 가구로서, 소득 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가구가 해당된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이나 재산으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정부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 각종 지원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약간 상회하는 소득이나 재산 수준으로 기초생활대상자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여전히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보다 열악한 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 바로 차상위계층이다>
그렇다면 정부 정책을 적용하기 위한 대상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상위계층… 사회학적으로는 애매모호한 개념이지만, 뭐 아무튼 정책적용 대상자의 자존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세심한 배려?
| 2009-02-24 19:56:58
Tuesday, April 13, 2010
껍데기는 이제 가라
일요일, 아파트 화단의 만발한 벗꽃 나무 아래서
가만 위를 올려다 보니 매미껍질이 보였다.
지난 여름의 잔재...
그 껍데기는 끈질기게 나무에 붙어 있었구나.
가만 위를 올려다 보니 매미껍질이 보였다.
지난 여름의 잔재...
그 껍데기는 끈질기게 나무에 붙어 있었구나.
이미 지난버린 과거에의 집착인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의 오래된 꿈인가?
가능태로서의, 생성으로서의 굼벵이는 놓아 두고 껍데기는 이제 가라...
April 13 2010, 4:16 AM by uque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