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8 항 ]
헤겔철학은 사유와 존재의 모순을 넘어서지 못했다. 현상학이 출발한 존재는 논리학이 출발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존재와 직접 모순된다. 이러한 모순이 현상학에서 '이-' 혹은 '보편적' 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체는 존재에 속하고 보편은 사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이 두개가 구분되지 않고 사유 속에서 합류된다. 그러나 추상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이것'과 현실의 대상이 되는 '이것' 사이에는 얼마만한 큰 차이가 있느나! 이 여자는 예를 들면 나의 여자이고 이 집은 나의 집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처럼 자기 집과 자기 여자에 대해서 이 집, 이 여자라고 말한다. '이-'라는 말의 논리적인 동의성과 비구분성은 그러므로 여기서 법적 의미에 의해 무너지고 지양된다. 논리적인 '이-'를 자연법에서 타당하게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저-'의 구별이 없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재산이나 여자의 공동사회로 곧장 나아가게 될 것이다. - 혹은 모든 법을 바로 폐기하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라는 실재성위에 기초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언어와 개별적인 사물 사이의 모순이다. 단지 언어에만 의존하는 사유는 이러한 모순을 넘어서지 못한다. 언어가 사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 처럼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된 존재가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헤겔에서는 여기서 처럼 실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이론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된다고 항의를 한다면 이 이론적인 관점이 여기서도 해당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는 바로 실천적인 문제이다. 즉 우리의 존재가 참여하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법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수하려고 하면 그것이 논리로 부터 분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논리에 의해서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천적인 관점인 먹고 마시는 관점까지도 현상학에 의해서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의 진리를 반박하기 위한 예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실존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언어적 혹은 논리적인 빵 - 추상적인 빵 -이 아니라 항상 여기 있는 언어가 필요없는 빵이다. 순전히 이러한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위에 기초된 존재는 그러므로 그 자신 어떤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진술된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멈추는 곳에 비로소 삶이 시작되고 존재의 비밀이 문을 연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모든 실존은 비이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은 항상 이러한 말해질 수 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존은 말해질 수 없어도 그 자체로 의미와 이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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