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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6,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07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2 항 ] 

원형으로서의 사물에 앞서고 사물을 창조한 신의 지식 혹은 사유와 그 모사(模寫)로서 사물에 뒤따르는 인간지식 사이의 구분은 결국 선천적 혹은 사변적 지식과 후천적 혹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구별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신을 사유하는 본질 혹은 정신적인 본지로 상상함과 동시에 감각적인 본질로 상상한다. 그러므로 유신론은 신의 사유와 의지를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작용과 직접 결부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작용은 사유나 의지의 본질과 모순되는 자연의 힘을 표현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물질적인 작용은 - 결국 그것은 감성적인 힘의 단순한 표현이다 -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창조 내지 산출이다. 이에 반해 사변철학은 사유의 본질에 모순되는 이러한 감각적인 활동을 논리적 활동이나 이론적 활동으로 바꾸고 대상의 물질적 산출을 개념에 의한 사변적 산출로 바꾼다. 유신론에서 세계는 순간적인 산출물이다. 세계는 수천년 전 부터 존재해왔으나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신이 있었다. 이에 반해 사변신학에서는 세계나 자연은 그 의미나 서열상으로만 신 다음에 온다. 우연은 실체를 자연은 논리를 전제로 하나 개념에 따라서 일뿐 감각적 현존이나 시간에 따라서가 아니다. 

유신론은 그러나 사변적이고 동시에 감각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을 가장 완고한 형태로서 신 속에 옮겨 놓는다. 그러나 세계와 대상에 앞서는 신의 지식이 사변철학의 선험적 지식에서 실현되고 진리와 현실을 얻는 것처럼 신에 대한 감각적인 지식도 근세의 경험과학들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고 진리와 현실을 얻는다. 가장 완전한 그러므로 신적인 감각적 지식은 결국 최고의 감각적 지식에 불과하며 가장 미세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개별성에 관한 지식이다. "신은 모든 개별물을 알고 있으므로 전지자이다"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무분별하게 한 갈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모든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알아내는 지식이다. 신학에서 하나의 표상이나 환상에 불과한 이러한 신의 지식은 그러나 자연과학의 망원경적, 현미경적 지식속에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지식이 되었다. 자연과학은 하늘의 별들을 세고, 물고기와 나비들의 배안에 있는 알을 세고 곤충의 날개에 있는 반점들을 세어 서로 구분해 놓았다. 자연과학만이 누에 유충의 머리속에서 288개, 몸통속에서 1,647개, 위와 장속에서 2,186개의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증명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해야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에 대한 인간의 표상이 인간종속에 대한 개인의 표상이며, 신은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의 총체로서 제한된 개체가 사용하도록 종속의 특성을 요약해서 종합한 총체에 불과하고 이러한 총체가 인간 속에서는 분열되어 있으나 세상사의 발전과정에서 실현된다는 확고한 진리의 예를 보게 된다. 자연과학들의 분야는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개관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 누가 하늘의 별들과 유충의 배에 있는 근육과 신경을 동시에 헤아릴 수 있는가? 뤼오네(Lyonet)는 누에 유충의 해부 때문에 고충을 겪었다. 누가 달속의 높낮이의 차이와 무수한 암몬조개와 테레브라텔 조개 사이의 구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가? 그러나 개별적인 인간이 알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인간들이 협력해서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개별적인 것을 동시에 하는 신적 지식은 인간종속(種屬)의 지식 속에 실재성을 갖는다. 

인간속에 어디서나 실현되는 신의 현현(顯現)도 신의 전지(全知)와 비슷하다. 한 인간이 달아나 천왕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찰할 때 다른 사람은 금성을 관찰하고 혹은 유충의 내장이나 전지전능한 신의 지배아래 지금까지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어떤 곳을 관찰한다. 그렇다, 한 인간이 유럽의 위치에서 한 별을 관찰하는 동안 이 별을 동시에 미국의 위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두 사람에게는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모든 곳에 동시에 나타나며 모든 것을 동시에 구별없이 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전지전능이 표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앞에서 여러번 언급된 상상체와 현실체 사이의 주요한 구분은 간과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상상속에서 우리는 4,059개가 되는 유충의 근육을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그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현실속에서는 하나하나 차례로 관찰할 수 밖에 없다. 상상 속에서는 이렇게 제한된 개체가 인간지식의 전 범위를 제한된 방식으로라도 상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지식을 실제로 습득하려고 하면 결코 이 지식의 끝장에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역사라는 학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리고 상상속에서 세계사를 개별적인 국가의 역사로 나누어 보고 또 그것을 개별적인 주(州)의 역사로 또 그것을 다시 한 도시의 연대기로, 이 도시의 연대기를 가족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로 나누어 보자, 어떻게 한 개인이 "여기 나는 인류의 역사적 지식으 마무리하는 곳에 왔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우치에 도달할 수 있는가 ! 아무리 우리가 연장시켜서 생각한다 할 지라도 지나간 우리의 생애나 다가올 미래의 생애가 우리의 상상속에서는 지극히 짧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러한 짧은 시간을 사후의 무한하고 끝없는 삶으로 보충시킬 수 있는 상상의 순간에 빠져들어 감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루나 한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 그것은 상상속의 시간은 공허한 시간이며 우리가 계산하는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나온다. 실제의 생애는 그러나 모든 종류의 산같은 어려움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 놓여 있는 충족된 시간이다. 


* Kant의 '선험적 지식'의 총체성 vs. 맨 바닥에서 또는 삽질을 통해 증명하게 되는 '경험적 지식'의 귀납성 (선험지식의 보완물, 또는 증거품)  "아~ ! 내 뻘 짓은 결국은 알리바이 제공용이었구나" 하는 허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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