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24 항 ]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동일철학의 핵심은 개념이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神개념으로부터의 필연적인 귀결에 불과하다.
사변철학은 신학이 신(神) 개념의 배타적 특성으로 만든 것을 보편화하고 사유와 개념일반의 특성으로 만든데 불과하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그러므로 이성의 신성을 표현한데 불과하며 사유 혹은 이성이 절대적인 본질이고 모든 진리와 실재성의 총체이며 이성의 반대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이 모든 것이라는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엄밀한 신학에서 신이 모든것 즉 모든 본질적이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그러나 사유와 분리되지 않는 존재 즉 이성의 술어나 규정으로서의 존재는 단지 사유된 추상적 존재이고 실재로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그러므로 사유가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절대적 사유는 스스로에게 이탈되지 않고 스스로에서 존재로 나아가지 않는다.
존재가 내세로 머문다. 절대적인 철학은 확실히 신학의 내세를 현세로 만들었지만 그 대신 현실 세계의 현세를 내세로 만들었다.
사변적 혹은 절대적 철학의 사유는 존재를 중재의 활동인 스스로와 구분해서 직접적인 것, 중재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유에 대해서 - 적어도 여기 우리가 갖고 있는 사유 - 존재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는 존재를 내세우지만 그 자신안에서 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직접 어려움 없이 스스로에 대한 반대를 지양해 버린다. 왜냐하면 사유속에서 사유의 반대자로서 나타나는 존재는 사유 자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직접적인 것에 불과하고 이 직접성만이 사유와의 구분을 만든다면 사유에도 직접성의 규정 즉 존재가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아주 용이하지 않은가! 단순한 사유의 규정이 존재의 본질을 만든다면 존재가 어떻게 사유와 구분될 수 있는가?
[ 제 25 항 ]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어떤것이 사유된 것 이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증명은 그러나 사유 자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는 없다. 사유의 대상에 존재가 첨부되어야 된다면 사유 자체에 사유와 구분된 어떤 것이 첨부되어야 한다.
존재론적 증명의 비판에서 사유와 존재의 구별을 나타내기 위해 칸트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러나 헤겔에 의해서 비웃음을 받았던 상상 속의 100탈러와 실제 100탈러 사이의 구분에 관한 예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옳다. 왜냐하면 한쪽 탈러는 머리속에만 있고 다른 것은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나에게만 존재하고 뒤의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 그것은 느껴지고 보여진다 ; 여하튼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동시에 존재하고 그에 관해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고 나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 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사유 자체속에서 나는 나와 일치하고 절대적인 주인이 된다. 여기서는 나에게 모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는 내가 동시에 재판자이고 당사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대상과 이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 사이에는 어떤 비판적인 구분도 없다. 그러나 순전히 한 대상의 존재가 문제될 때 나는 자기로부터 충고를 구할 수 없고 나와 구분되는 증인으로부터 청문해야 한다. 이렇게 사유하는 사람으로서의 나와 구분되는 증인이 감각이다. 존재란 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 특히 대상 자체가 연관되는 어떤 것이다. 존재는 주관이 되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가 주관이냐 객관이냐, 나 자신을 위한 존재냐 다른 존재를 위한 존재냐 즉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느냐는 참으로 똑 같은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상상의 단순한 대상이고 따라서 죽은 뒤의 사람처럼 내 자신이 아닐때 다른 사람은 나에 관해서 참으로 하나의 풍자화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나는 그에 대해 항의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실재로 존재할 때 나는 계산서에 줄을 긋고 상상의 나와 현실적인 나, 그의 대상이 되는 나와 주관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깨닫게 하고 증명할 수 있다. 사유속에서 나는 절대적인 주관이고 모든 것을 사유하고 있는 나의 대상이나 술어로만 타당성을 갖게 한다. 나는 여기서 관용이 없다. 이에 반해 감각활동 속에서 나는 여유가 있고 대상으로 하여금 나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본질로서 주관이 되게 한다. 감각과 직관만이 나에게 어떤 것을 주관으로 부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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