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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27, 2010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 12 - Feuerbach, 1843

"오래된" 미래철학에 대한 테제 ;


[ 제 17 항 ]

물질을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이성을 바로 신적인 본질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유신론자가 기분의 욕구에서 즉 상상력의 도움으로 무한한 행복을 요구하면서 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을 범신론자는 이성의 요구 때문에 신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긍정한다. 물질은 이성의 주요한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이 없다면 이성은 사유하고 싶은 충동이나 재료 즉 사유의 내용을 갖지 못한다.

물질을 포기하면 동시에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물질을 인정하면 동시에 이성도 인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합리론자들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신적인 본질로서의 이성을 간접적으로만 인정한다. 즉 범신론은 신을 유물론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때 해당하는 상상력의 본질로 부터 하나의 이성대상으로 혹은 이성의 본질로 만든다. 이성를 직접적으로 神化시키는 것은 관념론이다. 범신론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범신론이 유신론에 관계하는 것고 똑같이 관념론은 범신론에 관계한다.

주관과 객관은 늘 연관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적인 실체는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데카르트에 의하면 감각이 아니라 오성이 지각의 주체인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본질이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본질에 대해서 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의견은 가변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견 자체도 영속적이 아니고 가변적인 지식 즉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음악가에게는 음악의 본질이 최고 본질이며 청각이 최고의 감각기관이다. 음악가는 귀보다도 오히려 눈을 잃고 싶어한다. 이에 반해 자연과학자는 객관적인 본질이 빛이므로 눈보다는 오히려 귀를 잃고 싶어한다. 인간이 음을 신격화 시키면서 귀도 따라서 신격화 된다 .

우리가 범신론자처럼 신, 혹은 같은 의미의 절대적인 본질, 절대적인 진리와 실재성이 이성에 대해서만 대상이 된다고 말하면 결국 우리는 신을 하나의 이성체 혹은 이성본질로 규명하는 것이 되며 이성의 절대적 진리와 실재성을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성이 스스로에 복귀되고, 전도된 자기인식을 뒤바꾸고, 스스로를 절대적인 진리로 직접 표현하며, 어떤 대상의 중개물도 필요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스스로의 대상이 된다. 범신론자와 관념론자가 말하는 것은 동일하나 후자가 주관적으로 즉 관념론적으로 말하는 것을 전자는 객관적으로 즉 실재적으로 말할 뿐이다.

범신론이 대상속의 관념론이라면 관념론은 자아속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범신론에서는 실체인 신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신의 규정에 불과하며, 관념론에서는 자아 외에는 무이고 모든 사물은 자아의 규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념론은 곧 범신론의 진리다. 왜냐하면 신 혹은 실체는 이성 혹은 사유하는 본질인 자아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을 전혀 믿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신은 없는 것과 같으며 신은 나를 통해 나에게만 즉 이성을 통해 이성에만 존재한다. 선험적인 최초의 본질은 그러므로 사유된 본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본질이고 대상이 아니라 주관이다.

자연과학이 필연적으로 빛에서 눈으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철학은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사유하는 자아로 되돌아 간다. 눈이 없다면 밝은 빛을 주는 본질이며 광학의 대상인 빛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無와 같다. 자연과학은 여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더 나아가서 묻는다. 의식이 없다면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역시 무이다. 의식없이 보는 것은 못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다는 의식이 비로소 보는 것의 현실성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외부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가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가 어떤 것은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로 이 어떤 것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며 실제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절대적인 실재성이고 현실성이며 모든 실존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즉 의식된 것에 불과하다. 의식이 비로소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론에서는 이렇게 신학의 본질이 실현되고, 자아와 의식속에서 신의 본질이 실현된다. 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다. 이 말을 관념론의 의미로 풀어 쓰면 모든 것은 그것이 현실태이든 가능태이든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전제로 한다. 사물이나 세계 일반은 절대적인 본질인 신의 작품이고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본질은 자아 즉 의식하고 사유하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데카르트가 유신론의 입장에서 탁월하게 진술한 것 처럼 하나의 사고물(思考物)이며 신의 환영(幻影)에 불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물이 유신론이나 신학에서 다시 하나의 애매한 상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상을 실현하면 즉 신학에서 이론에 불과한 것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면 남는 것은 자아의 산물로서 세계이며(피히테) 혹은 - 적어도 우리에게 나타나고 우리가 직관하는 것과 같은 - 직관과 오성은 작품이나 산물로서의 세계이다(칸트)

"자연은 경험일반의 가능한 법칙에 의해 연역된다". "오성은 그의 법칙을 (선험적으로) 자연에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 법칙을 설정한다" 오성이 사물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물이 오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칸트의 관념론은 그러므로 사물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규정하는 신적 오성의 신학적 상상을 실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상의 관념론 즉 상상의 관념론을 신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반면, 지상의 관념론 즉 이성의 관념론을 인간적인 오류로 배격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신만이 관념론의 창시자이다. 여러분들이 이것의 결과(관념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神)도 거부하라! 관념론은 합리적인 혹은 합리화된 신학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관념론은 아직 제한된 관념론이며 경험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경험론에게 신은 상상이나 이론(일반적이고 보통의 의미에서)속에서의 신에 불과하며 활동이나 진리 속의 본질이 아니다. 신은 물(物) 자체 (Ding an sich - Thing it self)이나 그들에게 아무런 物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物이 되는 것은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물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경험론의 사유를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재료이고 그러므로 경험론은 신에 대한 재료를 더이상 알지 못한다. 신이 존재하지만 그들에게는 백지 즉 공허한 본질이나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신은 우리의 자아이고 오성이고 본질이지만 이러한 신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현상에 불과하지 신 자체가 아니다. 칸트철학은 아직도 유신론에 얽매여 있는 관념론이다.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본질 속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경우에도(아마 결코 진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이론적으로 진리가 되어 우리 두뇌의 제한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 적어도 많은 사물 속에서 이론적인 자유가 마지막 자유가 된다. 얼마나 많은 공화주의자가 마음이나 생각 속에서는 군주주의를 극복했지만 머리속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가, 그들의 공화주의적 정열은 오성에서 연유하는 반박이나 난제 앞에 실패한다. 칸트의 유신론도 이와 마찬가지다. 칸트는 신학을 도덕에서 실현함으로써 부정했다. 칸트에 의하면 의지는 자체에서 출발하는 참되고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실제로 신의 술어를 의지엑 되돌려 주었다. 그의 유신론은 이때문에 아직 이론적으로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유신론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칸트가 피히테이고 그는 "사변이성의 구세주"이다. 피히테도 칸트적인 관념론이지만 그러나 관념론의 입장에 선 관념론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경험론의 입장에서만 인간과 구분되고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관념론의 입장에서는 물자체와 신이 (왜냐하면 신은 원래 물자체이므로) 자아 자체 즉 개인이나 경험적인 자아와 구분되는 자아에 불과하다. 자아의 밖에는 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종교는 이성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관념론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유신론 혹은 일신론을 부정하고 실현한 것에 불과하며 종교적이고 물질적이고 내용이 충만된 유신론 즉 삼위일체의 부정이나 실현은 아니다.

헤겔의 절대적인 관념론이 비로소 후자를 실현하게 된다. 다른말로 말하면 피히테가 범신론의 신을 실현한 것은 이 신이 사유하는 본질일 때에 한하며 연장(延長)이 있고 물질적인 본질일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 피히테는 유신론적인 관념론이며 헤겔은 범신론적인 관념론이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신론-범신론-관념론의 자기참조적인 무한순환 구조"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게 아니라 자기수렴을 통한 무성생식적 확장일 뿐이다.
 
* 척도가 "신"으로부터 "이성" 혹은 "의식"으로 나아간다라고 해도... 결국은 현세 권력의 정치에서처럼 정파만 바뀔 뿐이지 그 구조나 판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원론 ;  삶은 신의 환영, 또는 "삶은 악령의 기만" - 양동이 속의 뇌..

* "우리는 종종 실제로는 어떤 사태나 이론이나 이념으로부터 해방되지만 두뇌 속에서는 해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을 가장 철저하게 다루는 두뇌는 가장 늦게 해방된다"("Wir sind oft laengst von einer Sache, einer Lehre, einer Idee der Tat nach frei, aber gleichwohl sind wir es noch nicht im Kopfe... Der Kopfe, weil er die Dinge am gruendlichsten nimmt, wird auch am spaetesten frei")
 
* 계몽주의 ; 체제/시스템/이데올로기로 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종교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해방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범우주적 신적 차원에서의 "억압"적 체계를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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