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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06, 2010

『반-외디푸스』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공격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제 그 자체입니다. 그 분석의 이론과 실제상의 환원, 축소 체계입니다. 욕망하는 생산을 이른바 무의식적 표상 체계로, 그리고 대응적인 표현, 이해 등의 인과관계 형태로 축소시키고, 무의식의 기계 공장들을 외디푸스, 햄릿과 같은 하나의 연극무대로 축소시킨 것이라든가, 리비도의 사회적 투자를 가족적 투자로 축소시키고, 욕망을 또 외디푸스 같은 가족적 좌표로 환원시켜 버린것 등을 말합니다…. 욕망의 기계장치는 점차 연극 장치처럼 되었고 초자아나 죽음의 충동은 기계장치 밖에 있는 신적인 것이 되어 버렸지요. 
요컨데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으로서의 욕망, 즉 생산하는 욕망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을 가족적 표상(외디푸스) 속에 가두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생산하는 노동으로서의 부의 본질을 발견하고서는 그것을 소유의 표상 속에 국한시켜 마지 않았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편집증(Paranoia)과 혁명적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정신착란을 고찰해보면 두 개의 극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파시스트적인 편집증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 분열증입니다. 정신착란은 그 두 극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제적 능기에 맞서는 혁명적 분열, 바로 이것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반-외디푸스』에 관한 이야기, 질 들뢰즈(Gilles Deleuze) &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라르크』지 49호, 1972 캐더린 바케스-클레망(Catherine Backes-Clement)과의 회견)
-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1995 中


정신분석학-특히 그 욕망의 가족극으로의 축소, 외디푸스같은 가족적 좌표로의 환원에 대한 비판.

무의식은 연극이 아니라 공장, 생산기계라는 사실과 무의식이 착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빠-엄마에 대해서가 아니라 종족, 부족, 대륙, 역사 및 지리 등 모든 사회적 분야에 대해서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 … 오래된 이야기이다….

| 2009-03-17 20: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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